[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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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1. '가야산 호랑이' 별칭

성철스님의 성격이 급하고 격하단 사실은 스님들 사이에선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큰스님이 찾는다하면 숟가락을 입에 넣었더라도 그 밥을 다시 뱉어 놓고 얼른 달려가야지, 입안에 밥 들었다고 다 씹어 넘기고 가면 벌써 늦는다.

언젠가 송광사 불일암에 머물던 법정스님을 찾아가 성철스님의 저서 『본지풍광』과 『선문정로』의 윤문과 출판을 부탁하며 며칠 같이 머물던 때였다.

글 잘쓰기로 유명한 법정스님은 "해인사 방장 성철스님과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 두 분의 성격이 너무나 대조적이야. 내가 언제 한번 이 두 분 큰스님의 비교론을 써 봐야겠어" 라고 말하곤 했다.

법정스님은 성철스님이 방장으로 있던 해인사의 큰절에서 오래 살았고, 당시엔 송광사에 머물던 터라 두 총림의 지도자상을 잘 비교할 수 있는 위치였다. 법정스님이 들려준 한 예.

"구산스님은 아침마다 빗자루를 들고 나오셔서 대중보다 먼저 청소하는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지. 그런데 성철스님의 그런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어. 구산스님은 제자들을 지도할 때도 자상하게 감싸주는 편인데, 성철스님은 아주 성한 살에 상처를 내 소금을 뿌리는 격이거든…. "

처음에 출가해서 나도 큰스님의 성격을 맞추지 못해 애를 먹었다. 큰스님, 꽤나 알려진 도인이라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산신령처럼 굵은 저음에 부드럽고 좋은 말만 골라서 천천히 말하리라 상상했었다. 그러니 얼마나 실제 큰스님의 모습과 반대인가.

물론 평소에야 감정 표현이 없는 편이지만 일단 화가 났다 하면 고함을 지르며 박한 말만 골라 퍼부었다. 그래서 급할 경우엔 36계가 최상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야단이라도 그때뿐이니까. 고비만 넘기면 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니 그나마 큰스님을 모시고 살 수 있었던 듯하다.

내가 백련암에 들어와 큰스님의 성정을 생생히 목격한 일은 '누운 향나무' 사건이다. 누운 향나무는 가야산 중턱에 있는 토종 향나무인데, 큰스님이 좋아해 몇 그루 캐다가 백련암 앞 화단에 심어 놓았다. 백련암에 공사가 있어 시멘트 포대를 화단가에 쌓아두게 된 날이었다.

큰스님이 마당에서 산책을 하다가 누운 향나무 가지 하나가 시멘트 포대에 눌려 있는 것을 봤다. 마침 지나가던 한 스님에게 "향나무 가지가 저렇게 눌려 있는데, 니 보기 좋나?" 고 한마디 했다. 시멘트 포대를 치우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마침 지게에 짐을 지고 가던 그 스님은 "예" 하고 대답을 하고는 지게의 짐을 내리느라 큰스님의 명령을 깜빡 잊었다.

큰스님이 그야말로 가야산 호랑이란 별칭에 걸맞을 정도로 산중을 뒤흔드는 고함을 질렀다.

"어른 말이 얼마나 말 같잖으면, 향나무 가지 좀 편하게 해 주라는데, 뭣이 바빠서 말도 안듣노. 아까 그 놈 당장 불러와!"

그 기세에 눌려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자 큰스님이 향나무 가지를 누르고 있는 시멘트 포대를 갈기갈기 찢었다. 원주스님이 달려가 백배 사죄하고서야 포대를 겨우 치울 수 있었다.

성철스님은 그런 자신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출가하던 그 해, 큰스님이 환갑이 됐는데, 40.50대까지만 해도 성격이 더 불같았다고 한다.

백련암에 자리를 잡은 것이 1967년인데, 그 무렵엔 잘못한 일이 있으면 신짝을 벗어서 등짝을 내리쳤다고 한다.

물론 60대 큰스님이 그럴 수는 없었지만 그런 결기는 여전히 느껴지던 무렵이었다. 큰스님이 화를 냈다가 풀어진 어느날 한마디 던졌다.

"내가 옛날에 비하면 지금 보살이 다 됐제?"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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