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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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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건물 우측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그때의 벅찬 감동과 희망을 전한다. (출처: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이 들판의 불길처럼 나라 안팎으로 맹렬히 번져 가던 1919년 4월 10일. 국내 3·1운동 주역들의 대표 현순, 일본에서 달려 온 신익희와 이광수, 미국에서 건너 온 여운홍, 만주와 러시아에서 온 이동녕·이시영·조소앙·김동삼 등.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허름한 셋집에 모여든 29명의 지사들은 그날 밤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을 구성해 머리를 맞대고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이때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을 안겨주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제 군주제를 부활하려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이 나라에 민주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뽑힌 이동녕의 발언에 잘 나타나듯, 이날 탄생한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 국가 수립을 위해 우리가 건너야 할 징검다리의 맨 처음 디딤돌이었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회복하자.” 이튿날인 11일 오전 10시까지 날을 새워 계속된 회의 끝에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따고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라는 의미의 민국을 붙여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정해졌다.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국정을 꾸려갈 책임자들도 뽑았으며, 헌법에 해당하는 ‘임시헌장’도 선포되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1조)’. 이제 황제의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복벽(復<8F9F>)운동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3조)’. 그때 이미 남녀동권 시대의 개막이 선언되었다. ‘공민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음(5조)’. 주권재민의 원칙에 따른 보통선거도 천명되었다.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폐함(9조)’. 사형과 공창제 폐지와 같은 시대를 앞서가는 조항들도 담겨 있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을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 우리 헌정사의 서막을 연 10개조의 임시헌장에 담긴 정신은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헌헌법’은 물론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는 현행 헌법 전문(前文)에도 면면히 이어져 흐른다. 거족적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잠들어 있던 우리 민족이 깨어나 하나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 형태와 임시헌장은 오늘 우리 시민사회가 지키고자 하는 정치체제의 기원을 이룬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