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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누각·정자 글 집대성 두정고 조창열 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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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라할 고려·조선시대 문인들이 천안의 누각·정자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이를 집대성한 천안두정고 조창열 교사가 남산 용주정에서 책을 설명하고 있다. [조영회 기자]

“유랑하는 백성 많은데 나만 편안하고, 길에서 굶주린 이 만나 오래도록 서성이네. 고달픔에 지쳐 옛 환성(천안의 다른 이름)에 들어오니 산과 물이 함께 길을 막아선다….”

퇴계 이황이 지은 ‘천안 동헌(東軒)’이란 한시다. 천안 두정고 조창열(51)교사가 펴낸 『천안을 노래한 한시』(천안문화원, 2006년)에 수록돼 있다. 조 교사가 『퇴계집』에서 추려 낸 것이다. 퇴계가 충청도암행어사 시절 천안을 들렀을 때 쓴 시가 아닌가 싶다.

조 교사는 이 책에 이어 2008년 『천안의 누정기와 한시』(한국학술정보)를 펴냈다. 천안의 누각과 정자에 남긴 고려·조선시대 관료·문인들의 글을 모두 모았다. 지금은 사라진 누정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이 남긴 글은 개인 문집 등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조 교사는 “천안이 교통요지인 관계로 당대 최고의 가객들과 고관들이 묵고 가거나 쉬어 갔다”며 “이 때 천안군수 등이 청탁해 글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우암 송시열은 ‘화축관기(華祝館記)’를 남겼다. 화축관은 현종 등 왕들이 온양 온천에 갈 때 천안서 묵어갔던 곳이다. 1670년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친 후 우암이 그 내력을 담은 기문(記文)을 지었다.

이 외에도 이색·정도전·김시습·서거정·김종직·김인후·이항복·허적 등 기라성같은 명사들이 천안에서 글을 남기고 있다. 조 교사는 “이처럼 천안은 품격이 넘치는 도시였다”며 “그런 사실들을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사라진 누정 및 정자 자리에 설명 푯말을 세우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천안 관아의 선화루(宣化樓)는 오룡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이항복이 기문을 쓴 수선정(水仙亭)도 오룡동에 있었다가 정유재란 때 불탔다고 한다. 서거정이 시를 지은 제원루(濟源樓)는 직산초교 뒷편의 직산향교가 있는 군동리에 있었다. 1375년 지어진 남원루(南院樓)는 구성동 구원거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남아있는 정자 중에서 조 교사는 북면 연춘리에서 입장면으로 가는 지방도 57호선 옆 복구정(伏龜亭)이 황폐화되는 걸 가장 안타까워한다. “예전엔 북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병천천 물길이 복구정을 감싸고 흘러 주변 경관이 더 없이 좋았다고 한다”며 “지금은 주위가 거의 방치된 상태로 잡초만 무성하다”고 말했다. 17, 18세기 병천 출신 김시민 장군의 손자 김득신 등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재미있게도 조선 3대 성리학 논쟁인 호락논쟁의 주역들인 채지홍(호론)과 이재(낙론)가 각각 한시 ‘복구정’을 남기고 있다. 호락논쟁은 아산 외암마을의 ‘주인공’격인 외암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 벌어진 인성(人性)과 물성(物性)논쟁이다.

경화 임용순 선생에게 한학을 사사한 조 교사는 성신여대에서 이언적 연구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천안경전성독회 회장, 한국한문고전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1세기엔 한문을 모르고는 한국은 물론, 한문 문화권인 동북아에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며 “학생들에게 항상 한문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학교에서 한문이 선택과목인 관계로 거의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고교에 진학하고 있어 기초 한문 수준의 수업 밖에 이뤄질 수 없다고 한다. 조 교사는 백석대에 출강하고 있다. “대학생들도 한문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으나 기초가 없기는 고교생과 마찬가지”라는 그는 “강의제목을 ‘교양한문’ ‘논어강독’으로 하니까 수강 신청을 덜 해 ‘생활한자의 이해’ ‘논어이야기’ 등 친숙한 제목을 붙이니까 많이 신청하더라”며 웃는다.

지난해까지 재직하던 천안오성고에선 영어·가정과목 등의 동료 교사들과 함께 중국 역사를 담은 『통감절요(通鑑節要)』(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축약한 책)를 강독했다. 그 책에 나오는 고사성어에 얽힌 옛 이야기를 뽑아내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천안 관련 많은 고문헌을 소장하고 있다. 최근 단국대 김근태교수가 한 논문의 각주에서 조 교사 소장 자료의 도움을 받았다며 그 수량이 1150종에 달한다고 쓴 바 있다.

조 교사는 천안의 금석문(비석 등 돌이나 금속에 새긴 글)을 총정리해 보고 싶다. 이 방대한 작업을 혼자 할 수 없어 같이 금석문을 함께 찾아 연구할 사람을 구하고 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금석문을 탁본을 해 모으는 데만 많은 인력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금석문이 정리되면 천안의 역사를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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