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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맛'인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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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점심 무렵, 남산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온다. 무료급식을 받는 줄이다. 예전에 보던 것보다 줄이 훨씬 더 길어졌다. 하루 한끼를 해결하지 못해 생계의 벼랑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압구정역과 교대역 등 유동인구가 많은 전철역 주변에는 하루종일 노점상과 단속반의 숨바꼭질이 계속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 속에서 생계형 노점이 급증하고 있다. 게다가 심각한 청년실업을 반영하듯 젊은 노점상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만큼 노점상끼리의 자리다툼도 심해졌다. 살기가 점점 더 각박해졌음은 물론이다.

대통령은 시장에 가보라

이맘때면 달력 특수로 밤샘 일을 하며 흥청거릴 서울 충무로와 을지로의 인쇄골목도 썰렁하다. 경기불황으로 기업체들이 내년 달력 물량을 줄이거나 아예 없앤 때문이다. 그래서 충무로와 을지로의 인쇄골목이 울상이다. 먹는 장사는 더 하다.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김밥 한 줄에 천원이다. 재료비도 안 나오지만 울며 겨자먹기다. 식당의 8할 이상이 적자 혹은 현상유지하기에 급급하다. 식당들의 휴업.폐업이 도미노처럼 번져가고 있다. 올해 들어 휴업하거나 폐업한 식당이 20만개가 넘는다.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게다가 지금 문을 닫는 식당들은 대부분 외환위기 당시 눈물 젖은 명퇴금으로 차린 작고 영세한 음식점들이 주종이다. 오죽하면 식당 주인들이 못살겠다며 자신들의 생존무기인 솥을 내던지며 '솥시위'를 벌였겠는가. 솥시위는 이미 생활경제의 '낙동강 전선'이 무너졌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런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민들의 애환을 직접 듣겠다며 얼마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하지만 정말 지금 세상이 어떤지 맛보고 싶거든 방송국이 아니라 양복 벗고 넥타이 풀고 욕먹을 각오 단단히 하고 시장으로 나가봐라. 지하철역으로 가봐라. 길거리 식당들에 가 봐라. 가서 손님 없어 맥빠진 시장을 직접 봐라. 살려고 버둥거리며 단속반과 숨바꼭질하는 노점상들의 핏발 선 눈을 직접 마주해 봐라. 텅 빈 식당에 몇 시간이고 앉아 손님 숫자 한 번 세어 봐라. 이게 말 되는 세상인지. 이래 가지고 살 수 있겠는지. 물론 노 대통령은 이 어려운 세월 속에서도 월급 고스란히 저축한다고 하니 뭐가 걱정이겠는가.

대통령은 방송에 나와서, 자기도 어렵게 자랐는데 사람 팔자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 사람 팔자 알 수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 지갑 안에 단돈 4000원밖에 없어 돌 된 아이 케이크 하나 사주지 못한 부모에게 팔자 피면 잘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대통령은 자신을 군대에 비유해 행군하다 낙오하면 앰뷸런스에 실어오는 '인사계'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행군하다 낙오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대 전체가 죽게 생겼다. 앰뷸런스에 싣고 자시고 할 상태가 아니다.

이런 와중에 난데없이 '뉴딜'소리가 나오고 있다. 언제 적 뉴딜인데 지금 이 판에 뉴딜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국민연금 등 연기금 빼서 뉴딜 한다고 하니 이젠 그나마 있는 것마저 고스란히 까먹을 판이다.

정치권 제 잇속 챙기기 바빠

총리가 국회에서 맞장뜨는 품새도 어째 좀 요상하다 했더니, 그 잘난 정치권은 저 혼자 이미 대선국면이다. 여권은 여권대로 야권은 야권대로 이미 저마다 대선가도다. 국민이 뭘 먹고 살건 말건 제 잇속만 챙기겠다는 심보다.

깊은 경제불황과 갈라지고 곪아터진 사회에 대한 염증이 함께 작용한 탓인지 출가입산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다. 외환위기 때보다도 많다. 특히 40대가 출가입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의 허리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행은 얼마 전 "10년 디플레이션이 끝났다"고 공식 선언했다. 일본은 10년 장기불황이 끝났다는데 이제 우리는 시작이다. 요즘 유행하는 CF 중에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하는 것이 있다.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아이들의 응원 덕에 억지로 힘을 내보지만 세상은 더 날선 칼바람만 넘실대고 있다. 이래저래 온 국민이 '죽을 맛'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