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마종기 '박꽃' 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 네, 아버지.

- 마종기(1939~ ) '박꽃' 중

그날 밤 문득 돌아보니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 그런데 왜 이제 와 갑자기 그 밤이 생각난 것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처럼 멀리 떠났다가 육친(肉親)의 근원 가까이로 돌아간다는 뜻일까. 놓친 시간의 강물 위로 추억의 등불들이 우련하다. 그리고 이제 박꽃 되는 고졸(古拙)한 밤이 그립다.

이시영(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