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28>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젊은 농사꾼 부부가 갓난애를 데리고 살았는데 아주머니의 얼굴이 너무도 볕에 타서 새카맣던 기억이 난다. 이웃에 내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그 무렵이 밤이 익어가던 때라 아이가 하는 대로 긴 작대기를 가지고 나가 밤을 땄다. 아직은 푸른 밤송이를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까면 흰 솜털이 그대로인 설익은 밤톨이 나왔다. 그래도 떨떠름한 거죽을 이로 갉아내고 어린 고구마 맛 같은 햇밤을 먹곤 했다. 밤을 따다가 비행기들이 폭격하는 모양을 한참이나 바라보기도 했다.

인민군의 소대 병력이 분산되어 낙골을 통과해서 야산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나가다가 싸리울 안으로 들어와 물 한 모금을 청하고는 다시 행군해 가곤 했다. 모두들 복장도 흐트러졌고 땀에 젖어 있었다. 앳된 병사들도 많았는데 특히 여학생 또래의 소녀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붉어진 눈시울을 닦고는 했다. 고등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두 남녀가 와서 물을 청했을 때에 어머니는 먹어 보겠느냐면서 솥 안에 두었던 햇고구마 찐 것을 내밀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받아먹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여자 병사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천천히 먹으라고 했더니 그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도 사투리로 자기네는 오누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때의 얘기를 할 적마다 "저희 어머니가 얼마나 애간장이 타겠느냐"고 회상하곤 했다.

하긴, 어머니의 그런 겁 없는 인정 때문에 나중에 아버지가 난처했던 경우도 있었다. 아직 전쟁 초기의 일이었는데 우리 동네로 인민군 소대가 행군해 가다가 길가 집이던 우리 집에 들어섰다. 인솔자인 장교가 길 건너 몇 집과 우리 집을 지목하여 양식과 반찬을 줄 터이니 밥을 좀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는 일개 분대 정도의 사람이 배당되었던 듯했다. 그들은 집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고 집 앞의 가죽나무 그늘에 흩어져 앉거나 열어 놓은 우리의 점포식 유리문 문턱에 걸터앉아서 얘기도 하고 담배도 피웠다. 아마도 하사관이었을 늙수그레한 병사가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면서 어깨에 엇비스듬히 메고 있던 전대에 손을 넣어 볶은 콩 한 줌을 주었다. 그는 두 손으로 비비고 입을 호호 불어서 콩 껍질을 날려 버리고 나서야 내게 주었다. 아마도 제 아들 생각이 나서였을까 그는 자꾸만 도망치려는 나에게 몇 살이냐, 이름이 뭐냐, 몇 학년이냐, '장군의 노래'를 할 줄 아느냐, 또는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을 불러 보아라 하며 귀찮게 굴었다.

누나들과 나는 초여름에 어린이들은 모두 학교에 나오라고 하여 며칠 동안 나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방학 때의 소집일처럼 맨손으로 나가서 등사판 노래책과 선전물을 잔뜩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우리 학년은 교생처럼 보이는 사범학교 여학생이 와서 풍금을 치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좀 기른 단발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곱게 생긴 교생이었다. 물론 수복 뒤에는 학교에 나왔던 선생들이나 사범학교 교생들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참 이상도 하지. 그 사나흘 동안에 배운 노래의 가사와 곡조를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었고 그런 기억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전쟁을 겪은 우리 세대 누구나가 농담 반 웃음 반 속삭이며 서로 확인하던 것이다. 그래, 아마도 부모를 포함하여 주위로부터 무서운 금지의 지시를 받으면서 더욱 뇌리에 남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림=민정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