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6개월 공백기’ 무슨 일 있었기에…더 무서워진 이세돌의 집중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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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바둑을 계속 이겨 17연승을 거둔 이세돌 9단의 모습은 혈혈단신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장수와 같다. 하지만 이세돌은 알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운은 지속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며 변화를 예고했다. [사이버오로 제공]

이세돌 9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어떤 신비한 힘이 그를 끝없는 역전승으로 이끄는 것일까. 타고난 맹수의 피일까. 아니면 깊숙한 분노일까. 6개월 휴직을 거쳐 지난 1월 복귀한 후 자그마치 17연승이다. 경기 감각이 무뎌졌을 것이란 우려와 달리 그는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승률 100%다. 이 동안 BC카드배 월드챔피언십 결승에 오르는 큰 수확도 거뒀다(24일부터 중국의 창하오 9단과 결승5번기를 시작한다. 우승상금은 3억원). 춘란배에선 8강에 올랐고, 2위로 미끌어졌던 한국 랭킹은 다시 1위가 됐다.

17연승이라니까 파죽지세를 연상하기 쉽지만 실상은 고전의 연속이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승리가 이어졌다. 복귀 후 첫 대국은 1월 16일 BC카드배 64강전이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아마추어 기사였다. 올해 BC카드배는 이창호 9단마저 탈락시킬 정도로 아마추어 돌풍이 거셌다. 이세돌 역시 악전고투였으나 처절한 난전 끝에 3집반을 이겼다. 온갖 풍파 끝에 아마추어에게 졌다면 무슨 소리를 들을 뻔했나. 이세돌은 분명 홍역을 치른 심정이었을 것이다.

16강전에선 세계바둑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중국의 쿵제 9단과 마주쳤다. 한·중 바둑 팬 모두가 주목했던 대결이었다. 여기서 이세돌은 초반에 대마가 죽는 사고(?)를 당하고도 바둑을 역전시킨다. ‘이세돌 바둑의 진수’라고 하기엔 너무 위험했던, 저승 문턱에서 되살아온 놀라운 한 판이었다. 4강전인 김기용 4단과의 대국도 초반이 나빠 고전이었고 계속 위기였으나 또다시 역전승했다. 6개월의 공백은 마이너스가 분명했지만 이세돌은 피를 토하는 듯한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 공백을 뛰어넘고 있었다. “나는 질 수 없다”는 굳센 결의가 신들린 역전승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6일 한국기원 2층 명인전 예선 대국장에 가보니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낮 12시 대국은 아직 10여 분 남아 많은 기사가 로비나 대국장 내를 서성이고 있었는데 이세돌 9단은 이미 조용히 자리에 앉아 후배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를 보고 씩 웃는 모습이 편해 보였다. 이날 이세돌은 16연승을 거뒀다. 이세돌 9단의 매니저 격인 ㈜킹스 필드 차만태 회장은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인고의 시간을 거치며 더 커진 것 같다. 세상을 알면 바둑도 강해지는 것 아닌가”라고 연승 배경을 설명한다. 세상과의 화해가 오히려 승부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해석이었다.

7일 박정환 7단과의 명인전 예선결승은 그래서 더욱 이목을 집중시킨 한 판이 됐다. 17세 박정환은 연초 이창호 9단을 격파하고 10단전에서 우승했다. 현재 2관왕이고 올해 21승3패로 전체 기사 중 최다승이다. 열 살 아래의 무서운 신예와 맞선 이 고비에서 이세돌은 다시 역전 불계승을 거뒀다. 이세돌은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오늘 바둑도 초반이 나빠 힘든 바둑이었다. 진부한 얘기지만 지금까지의 연승은 운이 좋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말할 수 없다.”

박정환마저 꺾고 17연승을 거둔 이세돌은 훨씬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창하오 9단과의 BC카드배 결승전은 꼭 이겨 우승하고 싶다고 말했다. “쿵제 9단 말고는 계속 한국기사를 꺾고 올라갔다. 결승에서 중국 기사에게 지면 팬들에게 단단히 혼날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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