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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찰' 미국 '세계 판사' 자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냉전시대에 세계의 경찰 노릇을했던 미국이 요즘 들어서는 세계의 판사를 자처하고 있다.

미국 법정은 현재 미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안까지 떠맡아 세계적인 송사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국제법정의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1일 미국의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는데 최근 들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의 월권에 대한 시비도 일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이 자국과는 상관없는 일로 사법권을 확대하고 있는 분야는 주로 인권침해에 관련된 것들이며 최근 들어서는 경제.경영분쟁에 관한 것들도 늘고 있다.

예를 들면 리펑(李鵬) 중국 총리는 수백명의 인명을 앗아간 천안문(天安門)사태와 관련, 미 법정에 제소된 상태며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은 자국에서 살인과 고문.테러를 명령했다는 이유로 4억달러에 달하는 민사소송의 피고가 됐다. 이밖에 찰스 영국 왕세자와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등은 북아일랜드와 리비아에서의 인권침해 혐의로 미국 법정에 피고로 제소됐다.

이와 관련, 뉴욕의 국제법 전담 법률회사인 '케이 숄로' 의 변호사인 그레고리 월런스는 "냉전시대에 미국은 세계경찰이었지만 냉전 이후의 미국은 세계판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 비유했다.

미국 법정이 미국과 상관없는 일을 다룰 수 있는 법적인 근거는 1789년에 제정된 외국인 청구법. 이법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에 대해서는 외국인이 다른 외국인을 상대로 미 법정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미 법정에 제소되는 미국과 직접관련이 없는 사건들은 최근 들어 반독점법이나 증권법 등 경제영역이나 공갈.해외테러 등 형사범죄 분야로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법정이 사법권을 확대 적용하려는 경향은 최근 들어 세계가 나날이 긴밀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부산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법학자나 법조인들은 미 법정이 국제적인 영향력을 휘두르는 기관으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외국 정부와 미 법률전문가들은 이같은 사법권 확대경향에 대해 조심스럽게 경고하고 나섰다. 다른 국가들과 위험스런 사법권(확대)경쟁을 일으킬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다.

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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