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 만에 빛 본 채만식 방송 원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단편 ‘레디메이드 인생’, 장편 『탁류』 등을 남긴 소설가 채만식(1902∼1950·사진)이 일제 말기인 1940년 이후 쓴 것으로 보이는 미발표 방송용 원고 세 편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는 최근 채만식의 방송극 원고와 채만식의 소설을 월북작가 조영출이 각색한 희곡 ‘미스터 방’을 부록으로 수록한 단행본 『환영의 꽃』(예옥)을 펴냈다.

‘채만식 문학 원본사진자료집’ 세 번째 책이다. 방 교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2006년부터 채만식의 친필 원고를 사진으로 보여주고, 현대어 본(本)도 함께 실어 책으로 묶는 작업을 해왔다. 친필 원고는 채만식의 아들 채계열씨가 소장해 온 것이다.

소설가 채만식의 미발표 방송소설 ‘일요일’의 첫 쪽. 채만식의 친필이다. 원고 표지에 ‘7월 29일 방송용 7월 27일 아침까지 검열을 부탁합니다’라는 문장이 일본어로 인쇄돼 있다. [예옥 제공]

『환영의 꽃』에는 모두 다섯 편의 방송용 원고가 실려 있다. 이중 ‘환영의 꽃’ ‘일요일’ ‘유쾌한 고참’ 등 세 편의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환영의 꽃’은 원고 표지의 제목 옆에 ‘방송극’이라고 써있다. 다음 장에 ‘김인식’ ‘그의 아내’ 등 등장인물이 소개돼 있는 명백한 방송극 대본이다. 실제 방송됐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원고의 필체가 채만식의 것은 아니지만 영락 없는 채만식 문체라는 게 방 교수의 분석이다. 부모를 잘 만나 전화기·피아노 등 신문물을 갖추고 경마·댄스파티·백화점 쇼핑 등 화려한 생활을 하는 젊은 부부가 하루 외출에서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와 보리밥을 맛있게 먹는다는 내용이다.

200자 원고지에 채만식이 직접 쓴 ‘일요일’과 ‘유쾌한 고참’은 소품에 가깝다. ‘일요일’은 창씨개명한 주인공 마쓰모도가 일요일을 과장 집에 져주기 바둑을 두러 가거나 탐정소설을 읽으며 보내는 등 체제순응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표지에 ‘방송소설’이라고 써 있고, ‘7월 29일 방송용 7월 27일까지 검열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문장이 일본어로 인쇄돼 있다. ‘유쾌한 고참’ 역시 일본인과 사이 좋게 지내는 30대 조선인 가장이 주인공이다.

방 교수는 해설에서 채만식이 1939년 시국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 게 문제가 돼 두 달간의 구금을 경험한 후 일종의 ‘강요된 대일협력’에 나서게 된다고 설명했다. 채만식은 장편 『여인전기』 등 친일적인 작품을 남겼고 지난해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기도 했다.

방 교수는 이번에 공개된 방송 원고들이 시대와 타협해야 했던 채만식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낸다고 분석했다. 평범하고 유쾌한 삶에의 신념을 되풀이해서 밝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오히려 석연치 않는 내면을 은연중에 드러낸다는 것. 채만식 문학의 총체적 면모를 보여주는 데 유익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신준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