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배낭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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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행처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쳇바퀴 같은 일상의 굴레를 탁 털어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다. 방랑시인 김삿갓처럼 바람 부는 대로 구름 가는 대로 흘러 가든, 빡빡한 일정으로 정신없이 주마간산(走馬看山)을 하든 여행은 유쾌하다.

바가지 좀 쓰면 어떤가. 책이나 영화로만 보던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새로운 풍물을 접하고,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그 지방 음식이나 향토주를 음미하노라면 누구나 왕이 된다. 위대한 작가들이 여행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듯 우리 소시민은 여행에서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독일 사람들은 유난히 여행을 좋아한다. 통계를 보면 8천1백만명의 인구 중 연간 6천3백만명이 여행을 한다. 이중 30% 정도만이 국내여행을 하고 나머지 70%, 약 4천5백만명이 해외로 떠난다. 겨울철 태양에 굶주린 이들이 선호하는 여행지는 스페인이나 터키.이탈리아 같은 지중해 연안 '태양의 나라' 들이다.

이런 본격적인 여행 말고도 독일인들은 주말에 집에 붙어 있지를 않는다. 금요일 오후면 도시를 빠져나와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행렬로 대부분의 고속도로가 막힌다. 멀쩡한 집 내버려 두고 숲속에 기어들어가 한 이틀 덜덜 떨다 오는 걸 보면 독일인들 몸속엔 '방랑벽 바이러스' 라도 있는 것 같다. 1895년 세기말 도시문명에 맞서 젊은이들에게 도보여행과 야영생활을 장려하기 위해 헤르만 호프만의 주도로 베를린에서 시작한 '반더포겔' (Wandervogel.철새)이란 청소년 운동의 정신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여유가 생기면서 여행이 중요한 연례행사가 됐다. 마침 지금이 여름철 휴가여행 계획 짜느라 즐거운 고민을 하는 철이다.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은 벌써 대거 해외 배낭여행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요즘 배낭여행의 의미가 달라졌다. 독일의 반더포겔처럼 젊은이들이 배낭하나 둘러메고 고생을 해가며 자연을 배우는 여행이 아니라 해외 유명 관광지를 도는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젊은 시절 떠나는 이런 여행도 얼마든지 유익하다.

그러나 내가 20대라면 한달쯤 시골 이곳저곳을 순례하고 싶다. 가끔 농부들 일손을 도와주면서 얻어 먹는 들녘의 새참이 꿀맛이겠지. 해거름 막걸리 한잔에 얼큰해진 농부가 벌리는 외지의 자식자랑도 기꺼이 들어주고 싶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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