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김중수호’ 한국은행 진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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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으로 처음 출근한 김중수 신임 한은 총재가 이날 오전 열린 취임식에서 연설하고있다. 김 총재는 1950년 한은 설립 이후 24번째 총재로 앞으로 4년간 한은을 이끌게 된다. [박종근 기자]

‘G20 의장국 위상에 걸맞은 한국 중앙은행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나갑시다’.

1일 취임한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취임사의 제목을 이런 문구로 장식했다. 역대 한은 총재의 취임사에는 별도의 제목이 없었다. 보통 ‘친애하는 한국은행 가족 여러분!’이란 문구로 취임사를 시작하는 게 관례였다. 김 총재는 “특별히 강조하고 싶어 이렇게 헤드라인을 넣었다”고 말했다. 국제 금융질서 형성에 한국의 입장이 반영되도록 한국은행의 역할을 넓히겠다는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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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한은 총재의 취임사를 보면 당시의 통화정책 방향과 한은의 위상을 읽을 수 있다. 통화정책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관한 시각도 드러난다. 정부와의 관계 설정과 시장과의 소통에 대한 의지도 담겨 있다. 1997년 말 한국은행법 전문(全文)이 개정되면서 한은은 독립의 기틀을 다졌다. 은행감독권을 떼주는 대신 통화정책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한은 총재가 맡게 됐다. 한은법 3조는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한국은행의 자주성은 존중돼야 한다’고 규정한다. 한은 총재의 4년 임기는 이때부터 확실히 보장됐다.

한은법 개정 이후 세 명의 총재가 한은을 이끌었다. 고 전철환 총재는 외환위기로 국민이 신음하던 98년 3월 취임했다. 그의 취임사에는 당시의 절박한 경제 현실이 반영됐다.

그는 “기업의 부도가 끊이지 않고 실업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한국 경제에 대한 해외의 신뢰가 회복되는 게 위기 극복의 첩경이라며 강력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 ▶부실채권 정리 ▶규제 완화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시중 유동성의 긴축 관리가 불가피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외환시장에 대한 안정적 관리도 그가 강조한 부분이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한국은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 총재는 4년의 임기를 채우고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이임사에서 “한은의 위상을 높이지 못한 점은 아쉽다”고 밝혔다.

이어 취임한 박승 총재는 한은의 독립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경제가 후진 단계를 지나 성숙 단계로 접어들면 정책의 목표는 성장 우선에서 ‘안정과 균형’으로 바뀌게 된다”고 역설했다. 이 때문에 시장 안정을 위한 중앙은행의 독립성 보장과 기능 확대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 총재는 임기 초 신용카드사들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으로 인해 불거진 카드 대란(2003년)을 막지 못한 데다, 콜금리를 제때 조정하지 못해 부동산 가격 폭등에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2002년 말 서울 아파트값이 전년 동월에 비해 30%나 폭등했는데도 한은은 콜금리를 올리지 않았다.

2006년 취임한 이성태 총재는 ‘과감한 결단’을 강조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불확실성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며 자산가격 상승을 막기 위한 ‘인플레 파이터’의 모습을 보였다. 취임 첫해 서울 아파트값은 24%나 올랐다. 이 총재는 취임 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꾸준한 긴축정책을 폈다.

그는 임기 동안 정책의 일관성을 지켜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중앙은행 독립과 물가 안정을 우선시한 나머지 글로벌 금융위기 초반에 정부와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이 총재는 이임사에서 “정부와 중앙은행의 관계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말해 중앙은행은 정부와 긴밀히 협조해야 하지만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1일 취임한 김중수 총재가 내건 화두는 ‘중앙은행의 새로운 위상’이다. 올해 11월에 개최되는 G20 의장국 위상에 맞는 새로운 한은의 모습을 갖추자는 뜻이다. 그는 한은의 독립성을 지키면서도 금융 안정을 위해 정부와 정책 협조를 긴밀히 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국제 공조도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에다 풀기 쉽지 않은 난제도 있다. 시중에 많이 풀린 돈을 회수하는 ‘출구전략’이다. 시장에서는 출구전략은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다. 시중에 돈이 풀리면서 가계부채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가계부채(판매신용 포함)는 734조원에 달한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53%나 돼 미국(129%)보다 높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다.

김 총재는 취임사에서 “최적의 출구전략 방안을 모색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박사는 “김 총재는 출구전략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제시해 시장과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출구전략 시행 이후에는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것도 김 총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덧붙였다.

글=김종윤·김원배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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