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동백꽃 피는 해우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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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태정(1963~ ), 「동백꽃 피는 해우소」중에서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듯 앉아
똥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세상사는 일의 걱정거리가 <해우소>의 <우(憂)>자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똥 누면 금방 몸에서 떨어져나가고 마는, 삶의 즐거운 안간힘 같은, 그런 <우>자 같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우>자는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을 가진 이의 것. 인생에 바라는 욕망이 해우소 나무쪽창처럼 작은, 꼭 고만큼만 작은 이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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