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총장 "사교육 필요없는 입시제도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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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울대가 안팎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내부적으론 학문 편중과 기초 학문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는 교수들의 불만.항의가 잇따르고 있고, 외부적으론 해마다 7천억원 이상 쏟아붓는 국립대의 체질 개선을 바라는 개혁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도전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기준(李起俊)총장을 김일(金日)사회부장이 13일 만났다.

- 인문.사회.자연대 등 기초분야 교수들의 성명 파동 등으로 서울대가 전례없이 어수선해 '서울대 위기론' 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위기는 변화를 위해 필요한 일종의 자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미국 총장들의 모임에 참석했더니 미국도 인문학의 위기가 있었고, 위기의식 속에서 발전해 왔다고 조언했습니다. 서울대를 세계적인 '한국학의 총본산' 으로 육성하는 작업 등을 통해 기초분야 지원을 확충할 계획입니다.

기초분야는 또 인터넷 시대에 콘텐츠 공급자로서 역할이 커질 수 있으며 자금 지원 방안도 강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 시애틀의 워싱턴대학을 보니 문리과대학의 연구비가 공대보다 많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부와 대학은 기초학문이 후속 세대를 키워나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합니다. "

- 국립대학인 서울대는 기초분야 위주로 재편해야 하며 의학.법학.경영학 등 실용분야는 전문대학원 체제로 가야 한다는 기초분야 교수들의 요구가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미국은 전문대학원 체제이지만 더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고시 제도 등 인재 등용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

- 李총장은 취임 이래 학문의 경쟁력.실용성과 투자 효율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기초분야 교수들은 李총장의 이런 학문관이 기초학문의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초분야건 응용분야건 연구자가 좋은 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세계 대학 가운데서 도태하고 맙니다. "

- 서울대가 교육부에 자체 발전방안을 제출하지 않고 있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현재 각 단과대학에 발전방안을 요청해 취합하는 단계입니다. 작업이 마무리되면 연내에 교육부와 협의할 생각입니다. 우리 대학은 서울대 설치령의 틀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굴레가 있어 불합리한 조항의 시정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

- 교육인적자원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립대 발전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총장으로 취임한 후 교육부 장관이 여섯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교육정책의 일관성이 문제가 됩니다. 현재의 국립대 발전방안은 대학의 자율성 신장 측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구조조정이라지만 대학의 직제나 인력 등 초보적인 사항까지 얘기하니 어렵습니다. 과거에 대학의 수준이 낮을 때는 교육부의 역할이 커야 했지만 현재는 대학의 수준이 크게 올라간 상태입니다. "

- 서울대 자체 발전안의 핵심적인 사항을 들자면.

"우선 재정 자립도를 높이는 게 중요합니다. 독립회계 제도 도입과 함께 대학이 능력껏 자금을 끌어올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잘하는 대학에는 인센티브를 주어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 도쿄(東京)대는 성과를 올려 재정 지원을 20% 더 받고 있습니다.

또 중국 베이징(北京)대도 대학 재정의 30% 이상을 자체 수익사업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서울대는 정부가 충분한 예산을 지원할 수 없다면 수익사업 등으로 스스로 벌어서 쓰겠다는 생각입니다. 대학 관리운영 체제의 개혁도 시급합니다.

대학 최고자문이사회(외국 명문대 총장 출신 등 10명선)와 교수평의회(30명선)를 도입, 일관된 대학정책을 수립하고 현실화하는 장치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학생 교육면에선 1학년 교육이 잘 돼야 대학교육이 잘 되므로 신입생들에게 우선 비중을 둘 생각입니다.

최근의 영.미인을 동원한 영어교육 강화 정책은 일단 성공했다고 봅니다. 국어.수학 교육도 개선하겠습니다. 영어로 가르칠 수 있는 교수들도 많이 확보하겠습니다. "

- 일본 도쿄대는 가시와 제2캠퍼스를 통해 전혀 새로운 대학체제를 도입했습니다. 서울대도 제2캠퍼스를 통해 신입생 전원 기숙사 입소, 영어 강의, 새로운 대학행정 시스템 도입 등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쿄대의 제2캠퍼스는 학교 부지가 모자라 건설한 것이 아닙니다. 백지 위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외국인 교수도 많이 두는 등 학생들이 글로벌 리더십을 키울 수 있어 긍정적입니다. 아직까지는 부지 등을 우리 대학 차원에서 검토하는 수준이고, 정부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 서울대 입시 제도의 방향은.

"성적순이 아니라 다양한 능력.특기를 지닌 학생들을 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 나갈 생각입니다. 특히 사교육의 효율을 최대한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입시 제도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서울대 입시안을 본 사설 학원 관계자들이 입시안이 난맥상이어서 따라가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고교에서도 비(非)교과 영역의 비중 확대, 심층 면접 등 대입 전형 방법의 다양화를 이해해 여러 가지 과외활동을 통해 학생 각자의 장점을 키워주는 교육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서울대는 장기적으로 50여개 학문 분야에서 스스로 필요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선발권 자율화를 추구할 계획입니다. "

- 서울대가 모델로 삼아 배우고 있는(벤치마킹) 외국 대학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립대학 중에서는 미국의 UC 버클리대.미시간대(앤 아버).위스콘신대(메디슨)가 그 대상입니다. 국제적 리더도 양성해야 하므로 사립대학 중에서는 스탠퍼드대와 하버드대를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스탠퍼드대는 특히 1960년대 이후 급성장했고 모든 분야를 망라한 대학이어서 주요 스승으로 삼고 있습니다. 입학제도는 UC 버클리대와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 대학은 신입생 중 50%만 성적으로 뽑고 40%는 지도력.특기로, 5%는 팀워크를 아는 운동선수를 뽑습니다. "

- 서울대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학이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우수 인력을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반성할 여지가 있습니다. 사회가 필요한 인재를 양성해야지요. 그래서 지난해부터 졸업생이나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현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회가 필요로 하고 학생이 필요로 하는 교육내용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

정리=조민근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 이기준총장은…

이기준 총장의 화두(話頭)는 서울대의 글로벌화다. 세계 유수 대학과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대학경영 원칙이다. 때문에 최근 서울대가 과학논문인용색인(SCI)의 논문 게재수에서 세계 55위로 20여 계단 뛰어오른 것이 총장 취임 이래 가장 기뻤다고 말한다.

1938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화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세이트루이스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화공학과 교수, 공대 학장을 거쳐 이공계 출신으로는 두번째로 지난 1998년 제 22대 서울대 총장에 취임했다. 부인 장성자(張誠子·여성부 정책실장)씨와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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