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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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0. 일천배 약속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만번 절하고 오겠습니다. "

참 당돌한 약속을 해버렸다. 큰스님 방에서 물러나와 친구 스님 방으로 내려왔다. 우선 절하는 방법을 배운 다음 각오를 다지느라 객실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3천배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친구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 했다. 친구는 "놀러 왔는데 절은 무슨 절이냐. 가야산 등산이나 하자" 고 졸라댔다.

"아니라, 큰스님하고 약속했으니 나는 절부터 먼저 할란다. 너나 먼저 가야산 갔다 와라. "

왠지 큰스님과의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혼자 가야산에 오르겠다며 떠났다. 나는 절돈 1만원을 내기 위해 천태전으로 올라 갔다. 일만배를 하는 방식은 '하루 세끼 식사는 하되 24시간 이내에 일만번 절을 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오후 1시니까 다음날 오후 1시까지 일만배를 해야 하는 셈이다.

"독하게 마음 먹으면 못할 거야 없지" 하는 생각에 시작했다. 저녁 공양시간까지 부지런히 한다고 했는데, 겨우 1천배였다. 저녁을 먹고 나니 독한 마음이 온데 간데 없어졌다. 친구 스님에게 말했다.

"아이구, 생각보다 절하기 힘드네요. 네시간 동안 절한 것이 겨우 1천배니, 일만배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절 그만하고 내려갈랍니다. "

그 정도면 성의는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친구 스님이 펄쩍 뛴다. 나야 절 안하고 가면 그만이지만, 내가 약속을 안 지키면 자기가 쫓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절 다하고 내려가야 한다" 며 한참을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못하고 저녁예불을 마치고 다시 천태전으로 올라갔다.

절집에선 저녁 9시가 취침시간이다. 천태전으로 올라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취침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가르고 지나갔다. 후회막급이었지만 약속한 일이다. 일어났다 구부렸다 하며 수도 없이 절을 하는데, 나중에는 지쳐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가늠할 길 없을 정도였다.

육신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왔다. 나중에는 절을 하던 중 서서 졸다가 몸이 기우뚱 균형을 잃는 바람에 소스라쳐 놀라 깨어나기도 했다. 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깜빡 졸음에 빠져 죽은 듯이 엎어져 있기도 했다.

새벽 3시면 스님들은 일어난다. 3시에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전날 저녁 9시부터 그날 새벽 3시까지, 6시간밖에 되지 않는데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엉덩이가 뜨끔해 고개를 들어 보니 친구 스님이 올라와 옆에 서 있다.

"아침 공양에 나오지 않길래 올라와 보니 이렇게 자고 있네요. 깨워도 깨지를 않아서 할 수 없이 엉덩이를 걷어찬 겁니다. "

절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꼬꾸라져 잠이 깊이 들었던 모양이다. 죽을 힘으로 아침 먹고 또 천태전으로 올라가 절을 하는데 이제는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할 지경으로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니 점심때까지는 절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점심 시간이 돼 엉금엉금 기어 내려오다가 큰스님과 마주쳤다. 큰스님이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절돈 만원 다 내놨나. "

얼떨결에 "예. 다 내 놓은 것 같습니다" 하고 얼버무리고 지나쳐 가려고 했다. 스님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어제 1시에 올라갔으면 오늘도 1시에 내려와야지, 한 시간을 못 채우고 내려오는 거 보니 니놈도 시원찮다. "

속으로 화가 났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위로는 못해줄 망정, 절돈 떼먹은 놈 취급하는구먼" 하는 서운함이었다. 더 머물고 싶지 않아 친구보고 "빨리 가자" 고 재촉했다. 그랬더니 친구 스님이 "그래도 큰스님 뵙고 가야지 그게 무슨 말이냐" 며 만류했다. 또다시 오기가 동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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