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서 애증까지:고수석의 북·중 돋보기] ⑩ 후진타오와 김정일 Part.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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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했지요. 동북아에 우려했던 새로운 안보위협이 생긴 것입니다. 후진타오가 ‘최선을 다해’ 막아보려고 했지만, 김정일은 보란 듯이 성공했지요. 오늘은 중국의 핵실험과 북한의 핵실험을 비교 분석해 보겠습니다.

중국의 핵실험을 먼저 얘기하지요. 중국은 1956년부터 핵무기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중국은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됐고 미국은 물론 소련과도 대립했던 시기이지요. 마오쩌둥은 “원자탄을 가져야 한다. 남들에게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 물건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지요. 지금 북한이 미국은 물론 한국과 대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마오쩌둥은 중· 소 관계의 악화로 소련 과학자들이 철수(1959~1961년) 한 뒤 ‘596 프로젝트’를 진행했지요. 596은 중국이 독자적 핵개발에 나선 1959년 6월 뜻하지요. 소련 과학자들이 철수할 즈음 중국은 이미 독자적인 핵개발 능력을 확보했지요 당시 중국공산당 서기처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은 연구원들을 만나 “비장한 마음으로 일해라. 잘못했을 경우 모든 책임은 우리 서기처가 진다”며 격려했지요. 그 때 덩샤오핑의 맡았던 총서기는 지금의 총서기가 아닙니다. 지금의 총서기에 해당하는 당시의 직책은 당주석(마오쩌둥)이지요.

1964년 10월 16일 신장 자치구 뤄부포(羅布泊) 사막에 세워진 높이 120m 철탑 위에 중국 최초의 원자탄이 터졌지요. 오후 3시 섬광과 함께 버섯구름이 일었지요. 오후 5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인민대회당에서 음악무용극 ‘동방홍(東方紅)’ 출연자 3,000 여명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1차 핵실험 성공을 발표했지요. 중국이 1958년부터 1964년까지 7년 동안 1차 핵실험에 쏟아 부은 돈은 적어도 40억 달러에 달합니다. 그 당시의 중국의 연평균 GNP가 500억 달러에 불과했으니, 핵개발 비용이 GNP의 1.5 %나 되었지요.

아직도 공업화 과정에서 고생을 하고 있던 중국으로서는 핵무기에 드는 비용이 실제금액보다 상대적으로 더 귀중했지요. 핵무기 개발에 소요된 비용은 공업화와 민간생활 향상을 위해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재래식 정규군의 장비와 무기 근대화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지요. 1959년에 있었던 펑더화이(彭德懷,1898~1974)와 황커청(黃克誠, 1902~1986) 등을 포함한 군부숙청도 핵무기 개발을 위시한 국가 자원 할당에 대한 지도층내의 의견 대립이 그 발단이 되었지요. 핵무기 개발의 문제는 중국의 군부 및 당을 위시한 권력층내의 끊임없는 충돌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북한도 마찬가지였지요. 북한 주민들이 경제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엄청난 비용을 들여 핵개발을 했지요. 핵개발을 할 당시 중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은 경제난보다 안보를 선택했지요. 우선 배고픔보다 생존의 더 급했던 것이지요.

저우언라이는 1964년 12월 “우리는 핵실험을 성공했다. 서방인들이 우리들을 줄 곧 불러왔던 ‘동양의 늙은이’라는 별명은 이제 떨쳐버릴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지요. 중국은 성공적인 핵실험을 통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중국은 1971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됐고 강대국 정치서열에 참여할 수 있는 티켓을 얻은 것도 성공적인 핵실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요.

중국 UN 대표였던 차오관화(喬冠華,1912~1983)는 1971년 11월 26일 UN에서 핵무기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발표했지요. 첫째, 중국은 미· 소와 같은 핵강대국의 대열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므로 비핵보유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참가하는 세계회의에서 핵무기의 완전금지 및 폐기의 문제를 검토한다. 둘째, 핵보유국은 이미 중국이 실행한 것 같이 언제 어느 상황하에서도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셋째, 특히 비보유국, 비핵지역, 평화지역으로 설정된 곳에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넷째, 외국 영토에 있는 모든 핵기지를 철거하고 핵부대, 핵무기 및 운반수단을 철수한다 등이지요.

중국이 최초불사용(no-first use=NFU)을 선언한 것은 주변국이 중국의 핵무장에 대한 불안감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이유는 중국 자신이 NFU를 약속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으로 하여금 같은 약속을 하도록 도덕적 압력을 가하려는데 있었지요. 중국은 아슬아슬하게나마 1960년대 후기와 1970년대 초 핵강대국(특히 소련)의 선제공격을 모면했으며, 1970년대 와서는 미· 중간의 접근으로 미국에 의한 핵공격의 가능성을 줄였지요.

북한 역시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중국이 거두었던 효과를 기대하지요. 첫째, 외부의 위협(특히 미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지요. 중국은 1956년 한때 든든한 안보의 후원자로 믿었던 소련이 배신하자 자기 생존의 본능에 따라 핵을 보유하려고 했고, 북한도 1992년 중국이 한중 수교를 맺으면서 자신을 배신하자 더 이상을 중국을 믿을 수 없게 되자 생존의 본능에 따라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지요. 둘째, 국가위신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는 국제정치 혹은 국내정치의 정책 및 전략적 필요성으로 핵을 가지려고 하지요. 북한은 핵 보유국이 된다는 것이 중국처럼 자신의 과학 및 산업의 힘을 증명해 보이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핵무기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강대국들로부터 이목이 집중할 수 있다고 계산했지요. 핵실험 이후 북한의 계산대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가 북한에 눈을 돌렸지요.

1964년의 중국과 2006년의 북한은 전 세계에서 보면 약소국이었지요. 그리고 양국은 당시 외부의 위협이 있었지요. 중국은 미국과 소련, 북한은 미국과 한국이 자국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약소국인 중국과 북한은 핵무기를 선택했지요. 약소국이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핵무기를 선택할 경우 그 유용성은 군사적으로 거의 없으나, 정치적· 심리적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유용성이 있었지요.

다음은 후진타오와 김정일 마지막편입니다.

☞고수석 기자는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를 거쳐 통일문화연구소에서 북한 관련 취재를 했다.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차장. 고려대에서 ‘북한· 중국 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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