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산책] 르완다 대학살 '보편적 처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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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20세기 인류의 최대 범죄 중 하나인 아프리카 르완다의 인종 대학살에 대한 역사적 단죄가 사상 처음으로 벨기에 법정에서 내려진다.

브뤼셀 중죄법원의 배심원단 12명은 8일, 19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50만명 이상의 투치족 대학살극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4명의 르완다인에 대해 평결을 내린다. 당초 평결은 7일 중 내려질 것으로 예정됐으나 배심원들의 요청에 따라 하루 연기됐다.

피고인 중 뷔타르대 교수인 벵상 느테지마나와 실업가인 알퐁스 이가니로는 학살을 부추긴 것은 물론 학살에 직접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베네딕트회 소속 게르트뤼드와 마리아 키시토 수녀는 수도원으로 피신한 7천여명의 난민을 학살 현장으로 몰아낸 혐의로 기소됐다.

배심원들이 유죄 평결을 내릴 경우 브뤼셀 법원은 재판을 열어 살인 등 55개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인들에게 형량을 선고할 예정이다.

전쟁 또는 내란 중에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행위가 유엔 차원이 아닌 제3국 법정에서 판결을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피고와 원고측 변호인 15명이 2백명 가까운 증인들을 소환, 2개월 동안 증언을 청취한 이번 재판은 벨기에 현행법이 중범죄에 대한 '보편적 처벌' 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벨기에는 93년 6월 중범죄에 대해 범죄의 발생장소 및 피고의 국적과 거주지에 상관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99년 반인도적 범죄와 인종 학살이 추가된 이 법은 일반 형법에 비해 형량이 높아 살인은 물론 인명구조 태만의 경우에도 무기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돼 있다.

이 법에 따라 지금까지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 콩고민주공화국의 로랑 카빌라 전 대통령, 3명의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전 지도자 등 외국의 많은 독재자들이 벨기에 법정에 고소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벨기에 외무부측은 이같은 급진적인 법률이 외국과 마찰을 빚을 우려가 있다며 법 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벨기에에서 이 법이 처음 적용되는 이번 재판이 반인륜 범죄에는 국경도, 시효도 없다는 교훈을 남기기를 바라고 있다.

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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