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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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1947~ )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들은 좋겠다! 나처럼 키가 작은 남자들이 이 시를 읽으면 분통이 터질지도 모를 일이다. 취약한 데를 건드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너무 흥분하지는 말자. 키가 작아도 이 시를 읽으면 괜히 즐거워지지 않는가.

그것은 낭만적 감성이 이 시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낭만은 사람을 젊게 하고, 시든 꽃도 활짝 피어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눈썹에 매달리고 싶어하는 그 순정한 꿈이 낭만의 구체적 표현이다. 남자들, 거울 앞으로 가서 눈썹 좀 살펴보자.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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