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불륜과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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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데 공공연하면서도 좀더 로맨틱한 불륜을 꿈꾸며 상상의 나래를 펴보는 재미를 외교정책 결정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지난 주말 경주에서 열린 국제교류재단 주최 한.중 미래포럼에 참가해 미국에 대적하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속내를 음미하고 있었다.

*** 고민되는 대미 ·대중 외교

개화와 개명을 위해 19세기의 우리 선조들은 '친중연미(親中聯美)' 를 내세우며 중국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미국과의 연합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열강의 각축전 속에서 조선은 이들에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자주권을 상실하게 됐다. 백년을 훌쩍 넘어 21세기를 맞은 한반도의 운명은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북한은 아직도 '친중연미' 의 염원 속에서, 남한은 '친미연중(親美聯中)' 으로 바뀌어 새로운 질서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정녕 우리는 선조들의 고민을 넘어 미국과 중국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보다 자주적으로 이룰 수는 없는 것일까.

조강지처와 애인을 모두 거느리면서도 서로 얼굴 붉히지 않으며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이해시킬 수 있는 매력을 지닌다면 그는 로맨틱한 불륜을 맛볼 자격을 갖고 있다. 그 매력은 금전이나 용모만으로는 따질 수 없는 고도의 매너와 포용력을 갖추고 서로의 질투를 잠재울 수 있는 무한한 인내력을 요구한다.

몰래 할 수만은 없어 어쩔 수 없이 드러내놓고 저질러야 하는 불륜이라면 상대방의 눈치를 극도로 살펴야 하는 고단수의 전략이 필요하다.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는 느낌을 상대방이 갖게 된다면 이 위험한 곡예는 지속될 수 없다.

미국과 중국에 한반도의 매력은 무엇인가. 미국이 동맹관계를 내세우면서 미사일 방어계획(MD)에 동참할 것을 요구할 때 아직은 전략적 모호성으로 한국은 뚜렷한 입장표명을 보류하면서 미국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불량국가로 분류된 북한을 목표로 하겠다는 미국의 MD에 대해 남북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한국은 북한의 경계심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렵다. 궁극적으로 MD의 목표는 중국이라며 강한 불신감을 나타내며 이 계획에 반대하고 있는 중국의 심정도 한국은 헤아려야 한다.

한국은 북한을 의식하며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는 미국과 중국을 함께 품으면서도 이러한 고달픈 처지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해야 하는 매력을 지니는 외교정책을 펴야 한다.

21세기 급변하는 주변환경 속에서 평면적이고 일방적인 대외정책으로는 한반도의 이해를 충분히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중국과 미국의 상호 입장을 활용하는 '용중용미(用中用美)' 로 상대방을 아우르고 감정적 교감을 나누면서 어쩔 수 없는 불륜을 용인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도 있다. 중국은 현재의 중.미관계 악화나 남북한관계 고착의 책임이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는 직접적인 언급을 서슴지 않고 있다.

*** 시련 이길 인내심 발휘를

그러나 중국에서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노골적으로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있는데 편승하기엔 미국의 요구가 너무 거세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기본축으로 하지 않는다면 남북관계 개선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지만 미국의 입장만을 두둔하기엔 중국과 북한의 반발을 외면할 수 없다. 미국에 대북정책을 강경일변도로 할 경우 한국에서는 반미감정을 일으킬 뿐이라는 식으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래서 중.미관계의 퇴보가 동북아에서의 한국의 입지를 약화시키기도 하지만 중국과 미국의 국가이익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꿰뚫어 양국에 호소하면서 우리가 처한 시련을 이겨내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살짝 질투심을 유발하게 하는 것이 관계유지에 반짝효과를 낳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불륜을 눈감아 줄 수 있을 만큼 조강지처와 애인을 함께 품을 수 있는 매력을 가꾸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이 한국외교가 가진 고민의 핵심이다.

안인해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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