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을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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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고은 시인의 미당 비판을 둘러싸고 미당의 시적 성과와 정치적 선택을 둘러싼 논의들이 몇몇 유력 일간지를 중심으로 각종 지면과 인터넷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단지 저널리즘의 화제성 기획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인 맥락을 함축하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한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당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우리 문단의 '뜨거운 상징' 이다. 시인의 삶 혹은 정치적 선택과 시적 성과를 둘러싼 근원적이면서도 예민한 쟁점들이 다름 아닌 미당을 통해서 얘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당을 둘러싼 최근의 논의들은 우리 문단도 이제 제대로 된 비판과 평가, 기록과 성찰의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소중한 과제를 던져준 것이 아닐까?

고은 시인의 미당 비판이 발표된 직후에는 문정희.이근배.이남호 제씨에 의해서 미당의 문학적 성과를 적극 평가하는 입장에서 씌어진 미당 옹호론이 발표되었다. 그 후 황현산.김명인.김지하(『실천문학』 여름호).김진석(『동서문학』 여름호)씨 등에 의해 미당의 정치적 선택과 훼절이 그의 미학적 한계와 밀접한 인식론적 연관성이 있다는, 보다 진전된 비판적 논의가 속속 발표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이미 몇 달 전에 진중권씨가 주장했던바, " '생명' 의 신비를 노래하던 그 입이 동시에 침략전쟁을 일으킨 '죽음' 의 전사들을 찬양할 수 있었다는 것" , 그리하여 "서정주 비판은 바로 이 기괴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그의 감성에 대한 비판" 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접맥된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삶과 문학적 성과를 분리해서 사유하는 입장에 반대한다. 다만, 이제 미당에 대한 비판은 그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단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정치적 삶과 글쓰기 사이의 섬세한 관계를 추적하는 작업으로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도 미당의 문학과 삶에 대한 단순한 찬반론을 탈피하여, 그의 잘못된 정치적 선택과 그의 문학적 세계가 동전의 양면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삶과 문학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내적 연관성을 치밀한 텍스트 독해 작업을 통해 분석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아울러 미당에 대한 무수한 비판들이 수행된 다음에도 끝끝내 남는 미당 문학의 '미학적 자율성' 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시대에 미당 서정주를 읽는다는 것은 정치적 압력에 쉽게 자신의 문학적 자존심을 포기한 뛰어난 시인의 상처와 재능을 똑바로 응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역사라는 괴물에 온몸으로 노출된 한 시인의 인간적 욕망과 현란한 수사학, 뛰어난 문학적 역량, 비극적 처세술 등을 구체적으로 탐문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슬픔이자 연민의 체험일 것이다. 모순 그 자체인 그 절묘한 이중성의 논리를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문학도 그만큼 성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설명한 의미에서 미당의 시와 삶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한 문학교육이자, 인문적 경험일 것이다. 그 훼절과 오점에 대한 독서조차도. 그래서 나는 다시 말한다. 미당은 우리에게 '뜨거운 상징' 일 뿐만 아니라 '슬픈 상징' 이기도 하다고. 그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고 응시할 때, 우리 문학은 앞으로 그러한 부끄러운 슬픔의 체험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권성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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