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10대산업 키우자] 8. 섬유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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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개발시대 수출 주역이던 섬유산업이 '사양산업' 이란 꼬리표를 단 지 이미 20년이 넘었다. 그래도 섬유는 살아 있다.

지난해 한국 수출의 10%는 섬유가 차지했고, 흑자도 1백37억달러를 올렸다. 단순 생산기지를 벗어나 지식집약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는 섬유산업의 실태와 육성방안을 알아본다.

머리카락 굵기의 원사를 1백 가닥으로 쪼갠 초극세사로 기능성 클리너(수건)를 만드는 중소업체 은성코퍼레이션은 미국.유럽 시장의 25%를 장악하고 있다.

은성은 수분 흡수력이 보통 수건의 세배가 넘어 기계청소에도 사용되는 이 제품을 지난해 미국 3M에 50억원어치 공급했고, 올 수출목표도 지난해의 두배(2천2백만달러)로 잡을 만큼 유망한 기업이다. 그런데 지난해 산업자원부의 소재 전문기업으로 지정받으면서 금융기관이 신용평가를 낮추는 바람에 애를 먹은 일이 있다. 그 이유는 사양 산업인 섬유업종이라는 것이었다.

은성코퍼레이션의 경우를 뒤집으면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현실과 가능성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선진국과 후발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지금은 설자리를 잃어가는 '애물' 산업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신기술 개발과 고부가가치화 노력 여부에 따라서는 '효자' 산업의 자리를 되찾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 가능성은 무한〓중소업체인 ㈜글로얀은 최근 밝은 곳에서 모은 빛을 어두운 곳에 가면 발산하는 '축광사(蓄光絲)' 를 개발, 수출해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프랑스 완구전문업체 제미니사가 이를 이용한 야광인형 '루미누' 25만개를 주문했으며, 중국.홍콩.이집트 등에서도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특수 약품을 아주 잘게 쪼개 실 속에 넣는 기술을 개발하느라 4년간 6억원을 들인 이 회사 강경중 사장은 "새로운 기술과 아이템에 투자를 계속하면 섬유는 결코 사양 산업일 수 없다" 고 강조했다.

한양대 김병철(섬유공학)교수는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패션과 다양한 신소재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가 커져 섬유산업이 더욱 진가를 드러낸다" 며 "그동안 쌓아온 생산기반에 신소재와 정밀화학.정보기술(IT)등을 접목하면 21세기에도 여전히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 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의 경우 인공 혈관이나 인공 심장을 만드는 데까지 섬유소재를 이용하는 등 섬유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각국의 노력은 치열하다.

◇ 아직 '질보다는 양' 〓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1백50여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의 98%가 이탈리아 등에서 수입한 원단을 쓰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고감성.고기능 소재를 찾을 수 없다" 고 말했다. 화섬 세계 4위, 합섬 직물 세계 1위의 생산력을 자랑하는 섬유 산업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자기 상표로 수출하는 비율도 3.2%에 그치고 있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 수출에만 안주해 온 탓에 세계적 패션 브랜드도 나타나지 않았다.

의류업체 종사자들의 직종 구성 역시 고부가가치화와는 거리가 멀다. 의류산업협회 회원사 종업원 2만7천여명(1999년 기준) 중 소득이 높은 연구직 종사자는 99명(0.4%), 디자이너는 8백50명(3.1%)에 불과하다.

패션산업은 섬유산업의 꽃이지만 이탈리아 등을 따라잡기에 역부족이다. 패션업계의 한 관계자는 "패션쇼나 패션잡지에 나온 작품을 베끼는 것은 잘하지만 창조적인 작품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고 말했다.

그 결과 세계시장에서 한국 섬유의 위상은 80년대 이후 계속 떨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보호막이돼온 섬유쿼터제가 없어지는 2005년이면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양희 박사는 "기획-생산-판매로 이어지는 국제분업구조에서 선진국이 고부가가치를 내는 기획.판매 기능을 독점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선진국의 생산 기지 역할에 머물고 있다" 고 진단했다.

◇ 지식집약산업으로 거듭나야〓전문가들은 섬유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길이 여러 가지 있지만, 단순 생산 중심에서 지식집약적 산업으로 바꾸는 것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목이라고 말한다. 독창적 디자인과 소재 개발, 컴퓨터와 IT의 접목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일본 도레이는 80년대에 벌써 세계 최초로 무인 섬유공장을 가동하면서 우리 기업들보다 몇걸음 앞서 나가고 있다.

국내 기업들 중에서는 제일모직이 판매시점관리(POS)와 전자문서교환(EDI)등 IT를 이용해 신속대응 시스템(QR)을 구축, 원단 주문에서 의류제품 출시까지 걸리는 시간을 3개월에서 40~60일로 단축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섬유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또 다른 길인 산업용 섬유 부문은 국내 업체의 준비가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다. 2011년이 되면 세계 섬유소재 시장(8천억달러) 가운데 절반 이상을 산업용 소재가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우리는 효성.제일모직 등 몇몇 대기업이 이제 막 제품개발을 시작했을 뿐이다.

산업연구원 이재덕 연구위원은 "선진국과 비교한 국내 업체들의 지식산업측면의 경쟁력은 품질관리면에서는 90%까지 따라갔지만 신소재.신제품 개발이나 독창적 디자인 개발면에서는 아직 60~70% 수준" 이라고 분석했다.

이현상 기자

도움=이재덕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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