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달라진 북 · 미관계 대처 제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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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지난 27일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 북.미 대화는 재개하되,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후 4개월간에 걸친 대북정책 재검토 결과 미국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1994년의 제네바 합의를 유지하겠지만 엄격한 검증절차를 거쳐 단계별로 협상을 진전시킨다는 원칙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마침 이 회의가 열리기 직전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파악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해 제임스 켈리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비롯한 국무부와 백악관의 한반도 관련 핵심적인 실무책임자를 모두 만나고, 마이클 아마코스트 브루킹스 연구소 소장을 비롯한 한반도 정책에 영향력이 큰 공화당 원로와 싱크탱크 관계자 등 20여명의 인사들과 개별면담을 하면서 격의 없고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공식적으로는 전 정권의 연속선상에 위치하지만, 내용적으로는 클린턴 행정부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수정이 가해질 것으로 보이며, 남북관계 촉진을 위해 성급히 움직이지는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이 우리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방인 대한민국에 대한 체면치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의 방북과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시도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면서,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북 포용정책이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위상만을 높이고 불의의 정권을 연장, 강화시켜 주는 데만 이바지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제네바 합의 준수 원칙도 실상은 합의서에 명기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의 철저한 준수가 전제되지 않으면 대북 경수로 지원문제도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 엿보였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북.미 대화에서는 핵문제.미사일 문제 뿐 아니라 재래식 무기에 대해서도 협상의제로 상정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미국이 대북협상의 원칙으로 강조하는 검증(verification)과 상호주의(reciprocity)는 내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두가지 원칙으로서 그 입장은 확고했다.

유연한 상호주의(flexible reciprocity)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유연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고 있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을 선도할 의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북.미 관계 개선의 선행을 원하는 한국측 요구도 완곡히 거부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자세를 부시 행정부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못 궁금하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제네바 합의를 지속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믿고 이에 의지해야 하겠지만, 앞으로 전개될 현실은 이와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임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북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대북정책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

한나라당도 아무리 부시 행정부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대북정책을 펼쳐나간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적극적인 교류 협력을 진전시켜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고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도록 하는 것이 평화체제를 확립하고 궁극적으로 통일에 이르도록 하는 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남북관계에 전향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손학규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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