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준태 '감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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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 김준태(1948~ )의 '감꽃'

남도의 키 크고 눈매 선한 이 시인은 역사를 천형처럼 짊어지고 시를 토해낸다. 그에게는 시를 쓰는 일과 역사를 인식하는 일이 한 몸이다. 보라, 빙빙 꼬아 둘러갈 것 없이 한걸음에 수십년의 시간을 내달리는 것을.

단 넉줄의 시에 영욕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가 가차없이 압축되어 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딱딱한 시간 구조가 '세다' 라는 동사에 실려 명료하게 우리를 찌른다. 여기서 누가 아프지 않겠는가. 여기서 누가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겠는가.

한때는 살육의 전쟁을 수행했고, 지금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부끄럽지 않은가. 특히 마지막 줄을 읽으며 당신과 나는 오래 침묵해야 한다. 당신, 그리고 나는 먼 훗날에 과연 무엇을 세면서 살아온 날을 되돌아 볼 것인가?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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