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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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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쪽에 다녀온 남쪽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에 올리는 것 가운데 한가지가 김치 맛이다. 젓국이 시커멓게 들어간 남도 김치의 얼얼한 맛도 아니요, 간을 했는지 말았는지 허여멀건한 개성 김치의 밍밍한 맛도 아니었다고 입맛을 다신다.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 맛에 아삭아삭 씹히는 배추 결이 일품이었다는 게 한결같은 품평이다. 다른 반찬이 낯설어 김치에만 젓가락이 가서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하나같이 그렇게 맛깔스러운 북쪽 김치는 당연히 대규모 김치공장에서 배급해준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노동에 바쁜 주부들이 언제 김치를 담가 먹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김치 공장은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집집마다 개성을 살린 김치를 창조하라는 가르침을 주어 김치 담그기가 집안 주요 행사가 됐다는 얘기였다. 특히 김장철이 돌아오면 평양 시내에 배추와 무를 가득 실은 트럭과 달구지가 줄을 잇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했다.

7일이 입동(立冬)이니 며칠 뒤면 평양 거리에는 배추.무에 각종 양념거리로 쓰일 남새(야채)를 산더미같이 올린 차들이 행진을 벌일 것이다. 몇 년 전까지 서울 중심가의 큰 시장 언저리도 그러했다. 겨울 밥상에 오르는 단골 찬이란 것이 김치.김칫국.김치찌개.김치볶음 등으로 김치가 통일을 했던 20여 년 전은 말할 것도 없다. 100포기, 200포기 김장을 하고 나면 겨울 준비는 반 이상 한 셈이었으니 우리에게 김치는 밥 다음으로 중요한 최고 음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남쪽에서는 이제 김치를 담가먹는 집보다 사다먹는 가정이 더 많다. 중국산 김치 수입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다. 김장철이라고 딱히 잘라 말할 수 있는 때도 사라져간다. 김치가 한국의 대표'슬로푸드(Slow Food)'가 됐으니 쌀밥이 또 그런 운명을 맞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식 패스트푸드 음식과 인스턴트 요리법이 우리의 밥상을 획일화하면서 여러 가지 맛이 사라지는 요즈음은 우리가'맥도널드식 입창살'에 갇히는 것은 아닐까 혀를 굴려보게 된다. 식량자급률이 27%대로 떨어진 현실에서 식량주권을 잃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음식이 농업의 문제이고 농촌의 문제이며 결국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지하 시인은 "김치야말로 통일의 지름길이다/짜건, 싱겁건/동치미든, 젓김치든/김치의 맛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이렇든 저렇든 참 삶은 마찬가지이듯"이라고 '김치 통일론'을 노래했지만, 지금은 '김치 자주론'이 더 시급한 시절이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