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외국기업인과 민노총 간부 좌담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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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한국 노조의 강경 투쟁이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모처럼 주한 외국기업인과 노동계가 마주 앉았다.

민감한 문제를 논의하는 만큼 긴장된 분위기였으나 좌담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서로의 입장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됐다" 고 입을 모았다.

좌담회에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제프리 존스 회장.주한유럽연합(EU)상공회의소 자크 베사드 회장.후지제록스 코리아 노부야 다카스키 회장과 민주노총 윤영모 국제국장.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민주노총 자문교수)가 참석했다. 사회는 산업자원부 산하 외국인투자옴부즈만 사무소의 김완순 박사가 맡았다.

"한국 노조의 강경 이미지 때문에 외국인들이 투자를 꺼린다.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도록 협력해야 한다. "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 상의 회장)

"사회적 보장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사문제 해결을 기업-노조에만 미뤄선 안된다. 무조건 감원으로 몰아가는 정부.기업의 태도에 노동자들은 소외감과 분노를 느낀다. " (윤영모 민노총 국제국장)

주한 외국기업인과 노동계 관계자들은 한국의 노사관계가 안정되기 위해선 ▶사회 보장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노동시장 유연성이 개선돼야 한다는 데 입장을 같이했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유연성 개선 방안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사회〓최근 강성노조.대립적인 노사관계 등으로 인해 외국인들이 국내 투자를 꺼리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현재 국내 노사관계를 어떻게 보나.

▶제프리 존스〓외국 투자가들이 한국 내 노사갈등으로 불안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대우차 사태와 같은 폭력 상황은 드문 경우이지만, TV.신문을 통해 한번이라도 접하면 이곳 상황에 대해 매우 안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 노조와 정부가 모두 과잉 대응해 이런 결과를 낳았다.

▶자크 베사드〓한국 노사관계엔 토론 문화와 신뢰가 없다. 회사들이 각각 처한 상황이 다른데도 노조단체가 관여, 일괄적으로 강경 대응해 문제가 불거지곤 한다. 또 회사 경영이 투명치 않으니 노조가 경영진을 못믿고 따르지 않는 측면도 있다.

▶윤영모〓우리 노조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별나게 강성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국내 노조가 유난히 강경하다거나 투자유치의 걸림돌로 비춰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최근 정부 고위층은 해외 공식석상에서 '노조가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어 미안하다. 잘 해결하겠다' 는 식으로 말을 해왔다. 그 때마다 노동자들은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소외감과 분노를 느낀다.

▶이병훈〓지난해 국내에서의 파업건수는 2백50건이었다. 영국이 구조조정을 겪던 1980년대 파업건수가 1천건이 넘었고, 프랑스도 90년대 4백~5백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노조가 유별나게 전투적이라고 볼 순 없다. 오히려 노조를 강성화하는 것은 국내 기업의 고압적인 경영방식.정부의 과격한 개입이다. 이런 것들이 노조원들에게 깊은 불신감을 심어주고 있다.

▶존스〓尹국장의 말대로 근로자도 경제의 한 축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안된다. 과거 미국에도 과격한 노조가 있었지만, 사회 각층에서 비난을 받고 외면당했다.

▶사회〓노사관계가 안정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노부야 다카스키〓한국에서 노사문제가 근본적으로 안정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야 한다. 전문 경영인이 맡아야 회사가 투명해지고, 종업원들이 회사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베사드〓단기적인 경영 실적뿐 아니라 회사의 장기적인 경영 계획을 종업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장기 계획을 고려치 않고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다 보니 일부 산업 분야에선 싱가포르보다 임금이 높아져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존스〓근본적으론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확보돼야한다. 현행 법은 경영상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만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있는데, 그땐 시기를 놓치게 된다. 경영자가 보다 유연성을 가지고 감원과 임용을 결정할 수 있도록 법을 완화해야 한다.

▶윤〓노조가 장기적인 경영 계획에 관심이 없다는 지적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근로자는 외환위기 이후 실업난을 겪으면서 일터에 오래 남아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나 자신감을 잃었다. 게다가 사회보장이 미흡하다 보니 회사에 생활보장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회사가 감원할 권리를 강화하는 것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개선할 것이라는 식의 접근은 문제가 있다. 사회적 보장이 선행돼야 한다.

▶이〓노동시장 유연성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시행상의 문제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사회보장제가 미흡해, 근로자가 해고되면 곧바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된다. 대규모 감원이 가능해진다고 노동시장 유연성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서히 정착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회〓대우차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또 노조전임제에 대한 생각은.

▶베사드〓노조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만약 대우차의 외형을 당장 줄이지 않고 지금 상태로 몇개월 더 끌어간다면, 수익성과 생존 가능성은 더 악화되고 회사 매각의 기회도 잃게 될 것이다. 고도의 기술과 글로벌 마케팅 능력을 갖춘 해외 업체에 하루빨리 매각해야 한다. 노조전임자의 봉급은 노조원들이 지급하는 형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윤〓대우차 처리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노조와의 실질적인 협력을 통해 일단 회사를 정상화한 후에 여러 대안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조급하게 해외 매각을 추진해왔는데, 이는 헐값 매각 등 사후적인 국민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노조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을 금지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에서는 노사 자율협약을 통해 임금 지급 방식을 결정하고 있다.

정리=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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