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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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주변환경이 크게 달라지거나 열악하게 변할 때 개인이나 기업은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은 그럴 수 없다. 나라와 민족에게 지리적 위치는 운명적 불변의 상수며, 좋든 싫든 간에 주어진 위치에서 버텨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국가의 지리적 요건을 중심으로 국제적 역학관계를 분석하려는 지정학의 전통이 꾸준히 유지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라를 둘러싼 이웃은 변하지 않지만 그 이웃의 범위는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있는 것이 근대사의 추세이다. 산업혁명으로부터 정보혁명에 이르는 역사의 다이내믹스는 이웃의 지리적 경계를 허물고 전세계로 넓혀갔다. 20세기 전반에 있었던 두 번의 전쟁은 '세계대전' 으로 기록됐고, 그 후를 이은 냉전도 세계 전역에 걸친 대결이었다.

21세기를 맞는 정보혁명과 자본 및 기술의 세계화는 이웃에 대한 전통적 인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어떻게 '지정학적' 요건과 '세계시장' 적 변수를 연계시켜 역사의 흐름을 진단하고 국가적 과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처방할 것인가. 이것은 학문적으로 큰 과제이지만 아직도 결정적이거나 교과서적인 이론은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의 생명과 살림엔 공백이 있을 수 없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우리 나름의 판단과 선택을 미루거나 잘못 했을 때는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우리는 역사에서 뼈아프게 체험하지 않았는가.

한반도는 참으로 '위험한 교차로' 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의 바로 이웃에는 일본.중국.러시아 세나라 밖에 없으며 그들은 모두 우리보다 훨씬 큰 나라들이다.

일본은 세계 둘째의 경제대국이며, 중국은 제일 많은 인구를, 러시아는 제일 큰 국토를 지닌 대국이다. 크고 작은 아홉 개의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독일과는 대조적이다. 이렇듯 위압적인 이웃을 가진 우리 나라가 제국주의 시대에는 식민지화의 수모를, 그리고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분단과 전쟁의 고초를 겪어낸 것은 무엇보다도 지정학적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정보화.세계화의 격류 속에서 어떻게 지정학적 한계와 위험을 극복하는 국가전략을 기획할 것인가는 가장 시급한 우리의 당면과제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국가적 과제는 물론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전환기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경제의 고도성장을 유지하기 위한 세계시장과의 유대를 넓혀가면서도 군사 및 정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영향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의 놀랄 만한 경제성장은 외자유치와 대외통상의 결과며 특히 대미(對美)무역의 규모와 흑자에 힘입은 것이다. 이러한 경제발전의 추세를 유지하기 위해 올해 안에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일단 WTO에 가입하면 환경.노동 등 많은 분야에서 국제적 규제와 규칙에 얽매이게 된다.

한편 중국 내에서의 빈부의 격차는 미국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악화하는 등 수다한 경제개방의 부작용을 수반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지도자들은 세계시장과의 연계를 통한 경제발전을 상당기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기본방침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은 티베트와 대만문제 등 국가의 정체성과 연계된 어려운 문제와 계속 씨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한국.동남아.인도.파키스탄 등 주변국가들과의 관계를 조정해 아시아 최강대국으로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계 최강국이며 태평양국가인 미국과의 관계가 결정적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몇달 고조된 미.중간의 긴장은 바로 그러한 지정학적 요인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국 정찰기와 승무원의 억류로 미.중 관계가 심각한 위기국면을 맞았던 기간 중 베이징에서 만난 한 중국지도자가 중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10차 5개년 계획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추진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던 것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정책과 전략의 우선순위를 시사하는 말이었다.

세계화란 역사적 전환기에 처한 일본.러시아 및 유럽 대부분의 국가도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정치.군사.경제.기술 등 모든 면에서 최강국이 된 미국과의 호혜적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민주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국가발전과 세계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조성해 정치안정을 기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외부요인을, 특히 영향력이 큰 외국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내셔널리즘적 충동과 유혹이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커진다. 심지어 최강국인 미국에서조차 경제가 어려워지면 개방보다는 세계무대와 자유무역체제로부터의 후퇴를 외치는 소리가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대중적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장기적 안목에서 나라와 세계의 진로를 모색하는 지도자의 일관성이 필요하며 우리의 현실도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한대로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는 변할 수 없고 그에 따른 지정학적 과제도 피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우리는 세계화와 정보화란 급류를 타고 있다.

세계화란 기회는 '최악' 이라고 생각해 온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최선' 으로 바꿔놓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은 열강 사이에 낀 '위험한 교차로' 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 발전을 위한 '정보화의 교환대' 로 변신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외국을 이해하고 외국어를 숙달하는 데 앞서가야 한다.

정보화시대에 맞는 새 기술과 생활양식을 보편화하는 데도 선두를 달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세계화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를 민족적 도약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위대한 비전을 지닌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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