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절경에 취한 선비들 명문 가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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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영조 14년(1738)제주도에 부임한 목사(牧使) 홍중징(洪重徵.1693~1772)이 제주시 용두암 부근 용연(龍淵)에 갔을 때의 일이다.

바다와 맞닿은 계곡물인 용연은 '비를 몰고 오는 용이 살고 있다' 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제주사람들은 당대 문장가였던 洪목사에게 40~50m에 가까운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는 절경지인 이곳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洪목사는 '취병담' (翠屛潭)이란 글씨를 남겼고 제주의 석공은 이를 병풍바위에 아로 새겼다. '용이 잠겨 있을 만큼 푸른 물' 이란 뜻이다.

洪목사의 제액(題額.지어내린 이름)에 지금도 한학자들은 그의 학문 수준을 입에 올리고 서예가들은 서체의 품격에 놀란다. 특히 풍광과 조화되도록 쓴 글씨 또한 일품이란 말도 오간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제주도. 그 풍광에 한 몫 하고 있는 멋진 돌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옛 선현의 문필이 남아 있다.

마애명(磨崖銘). 벼랑처럼 깎인 바위에 새겨 넣은 글들이 그것이다. 요즘의 시각에서 보면 '자연파괴의 현장' 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 문필가들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듯 자연의 품격을 소박하게 노래한 글들이 요즘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제주에는 1백20여기의 마애명이 남아있다. 제주가 유배지가 된 조선조 이래 대학자 또는 제주목사 등이 남긴 명문.명필들이다.

조선조 노론의 영수이자 당대의 대학자로 이름을 남긴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1607~1689), 목사 홍중징, 조선후기 지사 최익현(崔益鉉.1833~1906)등이 남기고 간 시문들도 수두룩하다.

제주도의 마애명 가운데 주목받는 곳은 방선문 계곡이다. 제주시 제주교도소 정문을 따라 남쪽으로 3백m를 따라가면 이르는 곳이다.

'들렁귀' 라는 세칭도 있지만 조선시대 이래로 방선문계곡이라고 불리는 이곳에 마애명 50여기가 몰려 있다.

한라산 계곡물이 바다로 뻗어가는 거대한 계곡으로 이름나 영주십경(瀛州十景)중 영구춘화(瀛丘春花.들렁귀계곡의 봄꽃)로 이름난 이 곳은 제주목사가 말을 타고 한라산 등정길을 떠날 때 쉬어갔던 곳이다.

방선문(訪仙門)이란 명칭도 이 계곡 안에 있는 아치형 커다란 바위가 '한라산신(漢拏山神)을 찾아갈 때 지나는 문' 과 같이 생겼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방선문이란 이름도 바위 천장에 달필체로 새겨져 있다.

신선을 찾아가려면 꼭 들러야 했던 곳이니 자연 선인들의 시문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방선문 계곡바위에 남겨진 선현의 또다른 시구 한토막.

石非神斧(착석비신부.귀신의 도끼로 돌을 깎은 게 아니라)/渾淪肇判開(혼윤조판개.천지가 개벽할 때 열려진 곳)/白雲千萬歲(백운천만세.오랜 세월 흰구름 싸여 있어)/仙俗幾多來(선속기다래.신선이든 속인이든 얼마나 많이 올까)-광해군 1년(1608) 판관 김치(金緻.1577~1625)

손인석(孫仁錫)제주동굴연구소장은 "푸석푸석한 다공질 현무암이 많은 제주섬 특성과 달리 방선문에는 결정이 매끄럽고 단단한 비현정질 현무암이 주류를 이뤄 글씨를 남기기에 적당했다" 며 방선문 계곡 특성을 설명한다.

방선문 이외에 남한 최고봉이자 제주 제일의 절경지로 꼽히는 한라산 백록담 일대도 빼놓을 수 없다.

한라산 백록담과 부근 탐라계곡 일대에는 조선조 선인들의 마애명 9기가 남아 있다. 경외감과 웅장한 자연에 놀라 감히 글을 남기기 겸연쩍었던지 이름 남기기를 꺼린 경우도 많다.

마애명 서체의 품격으로 보아 당대 최고의 학자.서도가의 솜씨라는 게 한학자들의 분석이다. 한라산 정상에서 느낀 감격과 제주에 유배를 오게 된 사연이 절절하게 배어 있어 한라산 정상의 감격을 더해주는 명물로 꼽힌다.

오문복(吳文福)제주동양문화연구소장은 "겸손이 몸에 밴 조선조 선비들이 아주 겸허하고 삼엄한 법도로 글을 써서 마애명으로 남겼다" 며 "자연과 함께 소중히 보존해야 할 문화 자원" 이라고 말했다.

제주〓양성철 기자

그래픽〓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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