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서 퇴장하는 '궁예' 그 죽음의 진실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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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역사는 과연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일까. 한반도가 사상 최장의 내전상태에 빠진 이른바 후삼국시대. 왕건의 승리로 귀결된 이 시대, 또 다른 주역이었던 궁예와 견훤의 생애와 관련한 역사기록은 과연 사실 그대로일까. 이미 알려졌듯 드라마 '태조왕건' 속의 궁예는 오는 20일, 최후를 맞는다. 역사속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1. 드라마 속 궁예는 왜곡?

"왕이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미복 차림으로 산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부양 지역 백성들에게 죽었다" - 『삼국사기』(1145년 편찬)

"(달아난 궁예는)이틀 밤을 지내고 몹시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는데 얼마 안 있어 부양 지역 백성들에게 죽었다" - 『고려사』(1451년 편찬)

918년 왕건의 '쿠데타' 로 축출돼 숨진 궁예에 관한 역사기록에도 미스터리가 있다.

그의 죽음에 비참함을 덧씌운 '보리이삭을 훔쳐먹었다' 는 대목이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없었는데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 나타난 것이다. 역사기록은 어차피 승리자의 몫. 세월은 거기에 윤색까지 해 사실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화제의 사극 KBS1 '태조왕건' 이 궁예의 죽음을 영웅의 비장한 최후로 그리게 된 배경에는 이같은 궁예 죽음의 미스터리를 제작진이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총연출을 맡은 김종선 PD는 "20년 넘게 왕을 한 사람이 보리 이삭을 훔쳐 먹었겠느냐" 며 "한 시대를 이끌어간 사람이 돌맞아 죽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승리자 왕건의 자손들이 써서 남긴 사료를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고 설명한다.

작가.연출자.기획자 등 제작진은 방영 초기부터 궁예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했다. 왕건과 최후 결투를 벌인 후 장렬히 전사하는 것, 궁예 스스로 자결하는 것 등도 죽음 장면 후보로 올라왔다.

하지만 제작진은 궁예가 자신의 최후를 경호실장격인 은부장군에게 맡기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에 왕건과 궁예의 마지막 술자리라는 낭만적 모습도 추가했다. 김PD의 설명은 이렇다.

"사실 궁예와 왕건이 서로 형, 아우라고 불렀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다만 드라마에선 궁예가 왕건을 끔직히 아꼈다. 그 둘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해야 할지 시간이 지나니 자명해졌다. "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 는 일부의 격렬한 항의가 뒤따를 것을 예상하면서도 제작진은 이 길을 택한 대신 사료에 나타난 내용을 해설자의 내레이션으로 알려주는 우회로를 마련했다.

#2. 궁예의 이미지 변천사

지난해 4월 1일 드라마 '태조왕건' 이 시작되기 이전 궁예는 말 그대로 '폭군' , '반 미치광이'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태조왕건' 은 궁예를 때론 카리스마를 지닌 '민초의 벗' 으로, 때론 '잔혹한 폭군' 으로 그려내며 사료에 의해 박제화됐던 그에게 생생한 인간의 얼굴을 주었다.

한편의 서사극같은 궁예의 스토리는 그의 외모의 변화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궁예의 외양은 '황금옷을 입고 고깔을 썼으며 금테를 둘렀다' 는 것 뿐이다.

의상학과 교수 등으로 구성된 의상 자문위원단이 역사적 고증을 통해 기본틀을 제시하면 연출자와 작가가 그것을 바탕으로 궁예의 의상과 소품 제작을 미술팀에 주문했다. 30여명의 스태프가 참가해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열리는 제작회의는 이런 식으로 궁예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제작진은 초기의 궁예에게 누르스름하고 다 떨어진 승복에 가사를 두르게 했다. 안대도 천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소박한 것이었다. 당시의 궁예에겐 백성을 벗삼아,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고 애쓴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모습이 필요했기 때문.

궁예를 연기했던 김영철은 방영 초기 "주인공에 걸맞지 않게 옷이 너무 남루하다" 는 불만을 제작진에 토로했지만 제작진은 "지금의 궁예는 더욱 더 민초들과 같이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한다" 며 일축했다.

궁예뿐만이 아니다. 견훤의 책사인 최승우가 쓰고 있는 고깔이나 왕건 책사들이 옷 위에 두른 띠는 고증학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소품들이지만 제작진은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사용키로 했다.

궁예의 이미지 반전은 독화살 사건을 기점으로 일어났다. 드라마의 제목이 '태조왕건' 인 만큼 왕건을 세우려면 궁예의 몰락은 필수적이었다.

뛰어난 지도자라는 초기의 이미지에서 "미륵을 자처하며 관심법으로 수많은 문무백관과 죄없는 부녀자들을 도륙했다" 는 사료상의 이미지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계기를 독화살 사건으로 설정한 것이다.

김종선 PD는 "독화살 사건 이후 북벌정책과 자주 외교 등 궁예의 원대한 꿈을 드라마적 상상력으로 그려내지 못해 궁예에게 미안할 뿐" 이라고 털어놓았다.

궁예의 포악한 이미지는 아내 강비와 두 아들을 처형하는 데서 극에 달한다.

사료상에는 강비의 죽음과 두 아들의 죽음이 시간차를 두고 있지만 제작진은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의 사건으로 처리했다.

결과적으로 궁예의 이미지는 드라마 '태조왕건' 을 통해 급상승 - 급강하의 대비되는 곡선을 그리다 죽음 부분에서 다시 급상승하게 됐다.

제작진이 궁예를 가지고 놀려고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궁예를 복권시켜 그의 한을 풀어주기엔 역량이 부족했던 탓일까, 시청자는 의문을 지울 수 없을 듯 하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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