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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들 엄마’ 한상순 애란원 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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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청소년 미혼모의 학습권이 주목 받고 있다. 지난 16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임신을 이유로 자퇴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학습권 침해”라며 “청소년 미혼모에게도 교육 받을 권리는 예외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임신 때문에 K여고에서 자퇴해야 했던 김수현(19)양이 제기한 진정 결과도 공개했다.

인권위 권고에 따라 김양은 재입학했고 학교장은 관할 교육청으로부터 경고 조치를 받았다. 김양은 지난해 12월 딸을 출산한 뒤 올해 K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인권위는 미혼모 시설인 ‘애란원’ 한상순(60) 원장에게 K여고와 협의해 달라고 도움을 청한 사실도 밝혔다. 한 원장은 28년 동안 미혼모들과 함께한 ‘미혼모들의 어머니’다.

지난 28년 동안 미혼모의 자립을 도운 ‘애란원’ 한상순 원장. 한 원장은 “미혼모가 학업을 마치지 못하면 자립하기 더 어렵다”며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다. [김경빈 기자]

19일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에 있는 애란원에서 한 원장을 만났다. 그는 “10대 미혼모들이 공부를 해야 취업할 수 있고, 취업을 해야 자립할 수 있다”며 “자립만이 청소년 미혼모가 재임신을 반복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K여고와 협의가 쉽지 않았지요.

“재입학을 요청하자 ‘어떻게 임신한 학생이 우리 학교를 다닐 수 있느냐’며 펄펄 뛰더군요. 아, 우리 식구들(미혼모)이 이런 학교 현장에서 왔구나, 그러니까 알아서 자퇴를 할 수밖에 없었구나….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애란원에 오는 미혼모들은 이미 자퇴를 하고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퇴학 안 당하고 소문 안 나려면 자퇴밖에 방법이 없다고들 하더니….”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75%가 임신 학생이 주위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본다는데요.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어린 학생이 아기를 가졌으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주변의 친구들이 보면 ‘어릴 때 임신하면 저렇게 고생하는구나. 나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살아 있는 성교육이지요.”

-출산과 공부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지요.

“하지만 공부하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어요. 저희 애란원도 처음엔 미혼모들에게 공부를 못 시켰어요. 학력을 갖추고 직업 훈련을 하려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드니까 간단한 직업 훈련만 했죠. 그랬더니 사회에 나가 유지를 못하는 거예요. 낮은 학력으로는 간호사라든지 자기가 원하는 일을 못 해요. 노동 집약적인 일밖에 구할 수 없죠.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기까지 하니까 자꾸 그만두는 거예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먼저 고졸 학력을 갖춘 다음 기술을 익히게 했어요. 그래야 적성에 맞춰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간호사·사회복지사·세무 행정직·컴퓨터그래픽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되니까 자립이 되더라고요.”

-주로 검정고시를 보나요.

“검정고시, 학력 인정 대안학교, 일반 학교 중 본인이 원하는 걸 선택하게 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학교에 다니라고 권해요. 검정고시로도 학력은 얻을 수 있지만, 학교 생활은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서 큰 의미가 있지요. 수학을 너무 싫어하던 한 미혼모는 학교 선생님 덕분에 수학이 제일 좋아졌대요. 자기도 그런 선생님이 되겠다면서 올해 수학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어요.”

한 원장은 “미혼모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줘서 자립하도록 도와주면 사회에도 도움이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미혼모들이 자립하지 못하면 그 자녀들까지 어렵게 살 수밖에 없어요. 미래의 빈곤으로 직결되는 거죠. 그 사회적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건가요. 또 미혼모들이 공부해 취업하면 당장 기초생활수급자에서 벗어나요. 도리어 국가에 세금을 낸다고요. 게다가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낳아 건강하게 잘 기르겠다는데 도와줘야지요.”

-최근에 아이를 직접 기르는 미혼모들이 늘어났지요.

“지난해 82%가 양육을 선택했어요. 2000년까지만 해도 20~30%에 불과했거든요. 입양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지요.”

-양육을 선택하면서 공부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겠군요.

“아이 기르기가 힘드니까 공부를 못할 것 같지요? 오히려 반대예요. 목적 의식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부해요. 학력이 있어야 직업을 가지고 아이를 키울 수 있으니까요. 자기 아이한테 ‘엄마는 중학교 중퇴’라고 하기 싫은 마음도 있고요. ”

한 원장은 “청소년 미혼모들은 금세 ‘두 번째 임신’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를 입양 보내고 6개월~1년 정도 정말 심하게 방황을 해요. 밥 대신 술을 먹고 피를 토하거나 정신 질환을 앓기도 하죠. 열다섯 살이라도 엄마는 엄마예요. 첫아이를 남에게 보낸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것도 자기 잘못으로. ‘우리 부모는 그래도 자식은 안 버렸는데 나는 더 나쁜 부모’라며 자신을 학대하다가 또 임신을 하죠. 어린 친구들이 임신하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에요. 성적으로 문란해서가 아니고요. 가정에 있을 곳이 없어서 거리에 나온 아이들에게 남자들이 접근하는 거죠. 열일곱에 두 번째 임신을 한 친구가 ‘난 너무 외로웠을 뿐’이라고 울더군요. 아이들에게 책임 지우는 건 기성 세대가 비겁한 거죠. 꿈을 다시 찾고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의무가 어른들에게 있어요.”

애란원은 다음 달이면 설립 50년이 된다. 10일엔 50주년 기념식, 13일엔 기념 세미나를 연다. 고된 50년이었다. 미국인 선교사(한국이름 반애란)가 애란원을 처음 세웠을 때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더니…’ 하는 신문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대기업의 후원은 한번도 받지 못했다. ‘윗분들이 싫어한다’는 이유였다.

한 원장은 딸만 셋이다. ‘당신 딸이면 애 낳게 하겠느냐’는 비난 때문에 잠 못 이룬 밤도 많았다. “미혼모를 도우면 미혼모를 조장한다는데 가정폭력 피해자를 도우면 가정폭력을 조장하나요. 공교육에선 10대 미혼모들을 쫓아내고 언제까지 우리 같은 시설이 편견 많은 사회에서 후원금을 걷어야 하나요. 이제는 사회와 국가에서 감당해야 합니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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