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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민심수렴, 안하나 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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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민주당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집권당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도대체 당에 구심점이 있는 것 같지 않고, 여당 후보가 7곳의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몽땅 떨어진 4.26 재.보선 결과가 나왔음에도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선거 다음날 김중권(金重權)대표는 "겸허하게 민심을 살펴야 한다" 고 했는데 역시 말뿐인 듯싶다. 민심 이반(離反)의 원인을 찾고 대책을 마련하는 진지한 모습이 전혀 없다. 민심을 수렴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인지, 할 능력조차 없는 것인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은 선거 다음날 "金대표를 중심으로 단합하라" 는 대통령의 메시지가 나올 때부터 예견됐다. 아마 여권 지도부는 우리 국민의 냄비근성 때문에 시간만 때우며 어영부영 지내다 보면 선거패배의 충격도 곧 잊혀질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재.보선 충격이 있은 지 며칠 만에 국회에서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을 표결하면서 99명의 의원을 집단기권시키는 희대의 기만극을 연출할 수 있었겠는가. 민심을 우습게 알기에 그런 해괴한 편법을 사용하고도 "법적으로는 문제없다" 고 떠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제 나온 '대선후보 조기 가시화론' 도 한심한 발상이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차기 대선후보가 유세에 나서야 득표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다. 민심이 악화된 근본을 치유할 생각은 하지 않고 권력게임이나 술수로 국민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려 그 틈에 궁지에서 벗어나려 한 게 아닌지 의혹을 사고 있다.

金대표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파장이 커지자 부랴부랴 "다른 최고위원의 얘기를 옮긴 것" 이라고 해명했다. 청와대도 진의(眞意)가 와전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여당 대표의 말의 무게가 이렇게 가벼워서야 당을 어떻게 끌고나갈 수 있겠는가.

당내에서 일고 있는 자성론에 대해서도 여권 지도부가 굳이 외면하고 있으니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다. 김원기(金元基)최고위원은 어제 "이대로는 민심수습이 불가능하다" 고 개탄했고, 정대철(鄭大哲)최고위원도 "할 수 있으면 내각이라도 다 갈고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면서 이무영(李茂永)경찰청장의 사퇴론을 다시 제기했다.

초.재선 의원들은 총리 해임건의안 투표과정에 대해 자괴감을 토로하거나 '헌정사에 남을 편법' 이라고 지도부를 비판하고 있다.

물론 여당 지도부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정 주도권을 야당에 넘겨주고 내년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도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반된 민심의 끝자락이라도 제대로 잡지 않으면 어떤 꼼수도 소용없다.

"누가 뭐래도 내 갈 길로 간다" 는 식의 오기(傲氣)정치를 청산하고 야당과의 대화를 통해 극단적인 대결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경제문제와 이미 시작한 몇몇 주요 개혁과제를 연착륙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것만이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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