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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그리스에서 본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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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은퇴 후 연금으로 생활하는 건 누구나 원하는 노후의 풍경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연금은 과도했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90%를 넘는다. 은퇴해도 일할 때와 비슷한 수준의 수입을 보장받는다는 얘기다. (참고로 올해 한국의 연금수급자는 생애 평균소득의 49%만 받는다.) 하루키는 이런 이유로 그리스를 두 얼굴을 가진 나라로 봤다. 여유는 넘치지만 활기는 잃은 사회.(무라카미 하루키,『먼 북소리』)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지금, 하루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그리스는 유럽의 골칫거리가 됐다. 나라 살림이 거덜 나면서 여기저기에 손을 벌리고 있다. 연금제도의 부실은 더 심각하다. 580개 위험 업종에 종사하면 60세 이전에도 연금을 받는다. 여성은 50세, 남성은 55세만 넘으면 된다. 위험업종에는 폭발물 처리 전문가나 광부 같은 진짜 위험한 분야도 있지만 미용사, 라디오·TV 사회자도 포함돼 있다. 미용사는 몸에 해로운 염색약을 다룬다는 이유로, 사회자는 마이크에 묻을 수 있는 박테리아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이유로 넉넉한 연금 혜택을 받는다.

이런 방만한 나라 살림을 견제할 장치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유로존(유로화 단일 통화를 쓰는 16개국)은 ‘단일 통화정책-국가별 재정정책’ 체제다. 돈은 통일시켰지만 나라 살림을 통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안정성장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을 맺었다. 재정적자 및 정부부채를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3%와 60%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는 협약이다. 이 견제장치는 그러나 작동되지 않았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프랑스·독일도 재정규율을 여러 차례 위반했지만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그냥 넘어갔다. 위기의 씨앗은 이렇게 뿌려진 것이다.

한국의 나라 살림은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지만 안심해서도 안 된다.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빠르다. 앞으로도 고령화로 인해 나랏돈 씀씀이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일할 사람은 줄면서 경제활력이 떨어지고 세금은 덜 걷힐 전망이다. 우리가 일찍부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이유다. 87년 하루키를 1년 만에 다시 만난 반젤리스는 “드디어 연금을 탄다”며 환히 웃었다. 아버지는 풍족한 연금으로 노후를 편안히 보내지만 대가는 컸다. 반젤리스의 두 자녀는 지금 빚더미 나라를 물려받아 신음하고 있다. 그리스는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다.

김종윤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