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 읽기] 6. 연재를 끝내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고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정통 학계의 전문가분들께는 상당히 생경하고 당돌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지금까지의 어떤 해석들과도 다른 독창적 해석에 놀라움을 표하면서 한편으로는 2천년 이상 그렇다고 배웠고 믿었고 또 가르쳐 온 학설들이 느닷없이 부서지는 데 대한 반감도 상당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내가 한학을 사사한 적도 없고 동양학을 전공하거나 어떤 전문적인 과정도 밟지 않은 아마추어라는 것 때문에 어떻게 상대해 주어야 할지 당혹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해는 간다.

동양학에 대해 내놓을 어떤 배경도 학력도 없는 일개 아줌마가 수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밥그릇을 걷어찼으니 오죽이나 황당하고 분개할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만약에 기존의 학계에서 정통 코스를 밟아 동양학을 배웠다면 나 역시 고정관념의 울타리 속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동양 고전을 읽는 데 접근 방법상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본다. 바로 '고전의 문법' 이라는 규칙의 근거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한자도 언어인 이상 하나의 '약속' 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약속이 성립되어 간 과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선시대의 선비.학자들이 글자를 배울 때 문법책이나 검인정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했던 것이 아니다. 한문의 문법이란 고전에 실린 용례의 보편적 적용에 다름 아니다.

어떤 글자가 어떤 고전의 몇 장에서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문법의 유일한 토대다.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고전에 사용된 글자의 의미조차 명확하게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옮기기에는 한자는 너무나 부족하고 불완전한 문자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글자를 가지고 여러 가지 소리 언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우리가 문자를 다시 말로 옮기는 데는 하나만이 아닌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자의 어떤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말을 '낙이불음(樂而不淫)' 이라고 문자로 썼다고 할 때, 실제로 이 글을 쓴 사람이 공자한테 귀로 들은 말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즐기되 음란하지 말라' 고 했을 수도 있고, '음란하지 않도록 즐겨야 한다' 고 했을지도 모르고, '즐기는 것에 음란함이 있으면 안 된다' 는 말이었을지도 모르며, '즐거움이란 음란하지 않은 것이다' 였을 수도 있다. 그 중 어떤 내용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저 문장에 쓰인 글자들의 용례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그런 용례는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용례들을 수집하여 분류하고 정리해서 만들어진 것이 한문의 문법이다.

조선시대나 당.송(唐.宋) 이후에는 이미 고전들이 많아서 그것들에 사용된 용례나 용법들을 하나의 약속으로 받아들여 문법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치자. 조선시대 유학자들도 그렇게 공부할 수가 있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고전의 주인공들인 공자나 노자는 어떤 약속을 토대로 글을 썼을까? 그들이 한자의 용례와 용법을 배우고 익힐 때 어떤 고전을 가지고 공부했을까?

공자나 노자가 본 책들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는다. 후대 사람들이 다시 쓰고 후대의 작문법으로 개작한 것들이 전할 뿐이다.

그러함에도 그런 책들의 작법은 오늘날과는 대단히 다르다. 글자 자체의 의미조차 오늘날과 다른 경우도 많다. 춘추시대의 학자들은 문법이라는 통일된 약속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가 한문을 쓸 때의 약속을 처음으로 만들어 갔던 사람들이다. 어떤 규칙과 약속하에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썼기 때문에 규칙이 되고 약속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토록 부족한 그림 문자들을 가지고 사람의 말을 옮겨 적는 데 그들이 얼마나 고심했겠는가를.

당시에 만들어져서 사용되던 글자들 중에 하나를 골라서 어쨌거나 말의 뜻을 담을 수 있도록 해야 했던 것인데, 그럼에도 어떻게 쓰더라도 원래의 말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왕필이나 주자도 도덕경이나 논어를 주해할 때 노자나 공자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 짐작하여 선택하는 데 그토록 애를 먹은 것이다.

왕필이든 주자든 도올이든 고전을 처음 쓴 원저자가 아닌 이상 제 아무리 학식과 권위가 하늘 같은 대학자라도 그 주석이라는 것은 고문을 읽은 자신의 느낌이요 소감이지 고전을 쓴 원저자의 본의라고 인정할 수 없다.

한자라는 문자의 구조적인 한계에서 오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한자를 옥편에서 찾아가면서라도 한글로 번역되고 주석을 단 해석본이 아닌 고전의 원문을 한자 그대로 읽어야 하고, 그렇게 원전을 읽는 방법론과 해석법을 일반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왕필이나 도올이나 혹은 서양에서 번역한 도덕경이 아니라 노자의 도덕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 대만의 대학자들이 해석하여 놓은 논어가 아니라 공자의 논어를 읽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원전에만 있다. 모든 해석은 각자의 것일 뿐 공자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 누구나 옥편 한 권 들고 앉으면 고전을 읽어나갈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이다.

한자라는 것이 본래 글자 하나 하나가 고유한 뜻을 가진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각 글자의 의미만을 알고 나열해도 순서나 문법에 관계없이 전체의 의미 파악은 대체로 가능하다.

중요한 어조사 몇 개의 기능과 역할만 알아도 고전의 독해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직접 원문을 읽고 자기가 깨치는 것이야말로 동양학의 올바른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양철학의 대중화에 있어서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해석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원문을 읽는 방법과 한자에 대한 습득이고 생활화이다. 그런 의도에서 쓴 책이 『노자를 웃긴 남자』이다.

논어의 문법은 논어 속에 있고, 도덕경의 문법은 도덕경 속에 있다. 나는 도덕경을 해석할 때 도덕경 외의 다른 용례나 문헌은 보지 않았다.

그래서 노자의 본의에 더 접근한 번역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책을 낸 후에 많은 분들이 나에 대한 궁금함과 책을 쓴 의도와 동기들을 물어 오셨다. 그런 분들께 부족하나마 답변의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이 칼럼을 쓰게 되었다.

소중한 지면을 할애해 주신 중앙일보와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가지 조언과 비판을 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다 못한 답변은 책을 통해서 해드릴 생각이다.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 저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