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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혀로 세상을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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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영국 리버풀 출신의 크레이그 룬드버그(24·사진) 일병은 2007년 이라크 바스라에서 두 눈의 시력을 잃었다.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룬드버그 앞에서 수류탄이 터진 것이다. 정신을 잃고 난 뒤 의식을 회복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암흑 상태였다. 여자친구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안내견의 도움 없인 집 앞도 함부로 다닐 수 없는 완전 실명 상태가 돼버렸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그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룬드버그는 14일(현지시간) 영국 국방부가 개최한 시각장애인용 장비 브레인포트(Brainport) 시연행사에 참석했다. 장비를 착용한 룬드버그에게 국방부 직원이 ‘CAT(고양이)’라고 쓰인 카드를 보여줬다. 룬드버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CAT.”

룬드버그와 같이 시력을 잃은 장애인들이 혀를 통해 조금이나마 빛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BBC방송이 전했다. 미국에서 개발된 브레인포트란 장비의 도움으로 간단한 글을 읽거나 형체를 구별하고, 혼자 걷는 것 등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 장비는 소형 비디오 카메라가 달린 선글라스와 혀에 부착하는 센서로 구성돼 있다. 카메라가 촬영한 눈앞의 사물 이미지는 브레인포트 본체로 전달된 뒤 전기신호로 바뀐다. 이 신호는 ‘롤리팝’이라 불리는 센서를 통해 혀로 전달된다. 사용자의 뇌는 혀에 전달된 전기신호의 따끔거리는 강도에 따라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강한 자극은 흰색, 무자극은 검은색, 중간 자극은 회색으로 인식되는 방식이다. 사용자는 사전훈련을 통해 정해진 규칙대로 뇌에 인식된 이미지를 해석한다.

룬드버그는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사탕을 빠는 듯한 느낌”이라며 “혀에 신호가 오면 사물의 선과 모양이 2차원의 흑백 이미지로 인식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브레인포트가 혀에 전기신호로 보낼 수 있는 패턴은 400가지 정도다. 연구진은 이를 4000가지로 늘릴 계획이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사용할 수 있게 장비의 소형화도 추진 중이다.

영국 국방부는 브레인포트를 사고로 시력을 잃은 군인들에게 지급할 계획이다. 국방부는 한 명당 약 1만8000파운드(약 3100만원)를 투자해 장비 구입과 신호 해석 교육을 받게 할 방침이다. 룬드버그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기를 사용하는 첫 실험자로 선정됐다. 그는 장비를 개발한 미국 연구진을 찾아가 신호를 해석하는 훈련도 받았다. 브레인포트 덕분에 손으로 더듬거리지 않고 물건을 집어 드는 것도 가능해졌다고 한다.


룬드버그는 “이 장비가 아직 시제품 단계지만 삶을 변화시킬 잠재력은 크다”며 “브레인포트는 나에게 최고의 보상”이라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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