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삶·문화 오롯이 … ‘제주판 워낭소리’ 잔잔한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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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영화 ‘어이그 저 귓것’의 한 장면. 귓것(모자란 놈) 하르방(할아버지)이 마을 밭길을 헤매고 있다(왼쪽). 주인공 용필이 어머니 묘로 착각하고 엎드리고 있고(가운데) 집 나간 남편을 동네 골목길 에서 기다리는 제주의 여인.

“너 그거 아직도 못봔(못 봤느냐). 잘도 웃기메(꽤나 웃긴다).”

영화는 기타를 멘 한 청년의 낙향으로 시작된다. 고인이 된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갔건만 이미 묘는 비어 있다. 이장된 사실도 몰라 오열하지만 그 다음 장면이 가관이다. 동네 이웃 할아버지가 그런 청년을 보곤 “너 여기서 뭐 햄시니(뭐하냐)? 너네 어멍(어머니) 산(묘)은 저기 아니가게(아니냐). 어멍 산도 몰람시냐(모르냐).” 첫 장면부터 웃음이 쏟아진다.

서울에서 가수로 출세해 보겠다고 상경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목에 깁스를 하고 절름발이까지 돼 낙향한 주인공. 하지만 음치나 다름없는 후배, 춤에 빠진 또 다른 후배가 찾아와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며 “노래 좀 가르쳐줍서게(가르쳐 주세요)”라고 떼쓴다. 제주사람이 아니라면 자막 없이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원단’ 제주 사투리투성이다. 제주시 애월읍 조그만 마을을 배경으로 개발로 무너지는 제주의 자연과 대형 상권에 밀린 동네 점포의 비애, 사라져가는 제주의 문화를 사투리 언어와 사투리 노래로 1시간40분 동안 다루고 있다.

‘제주토종’ 독립영화 ‘어이그 저 귓것(모자란 놈)’이 얘기다. 2월 초 제주의 조그만 소극장에서 딱 한번 50여 명을 모아 시사회를 한 정도인데 소문이 퍼져 일부 젊은 층 사이에선 마치 인기 비디오를 돌려보듯 한다. “제2의 워낭소리나 다름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영화는 놀랍게도 처음 장편영화를 만들어 본 오경헌(39) 감독의 작품이다. 들어간 제작비는 고작 798만여원이다.

주연 중 한 명은 제주에서 사투리로 노래하는 가수 양정원(42)씨. 1994년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그는 마치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것 같아 선뜻 나섰다. 조연은 지역 민요 패와 작은 극단에서 몸담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언더그라운드’ 배우들이 맡았다. 물론 개런티도 없다. 제작기간 중 또는 제작이 끝나고 난 뒤 배우와 스태프가 함께 어울려 식사나 한 게 고작이다. 단역은 영화의 배경인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주민들이 선뜻 응했다. 지난해 여름 45일 만에 제작을 뚝딱 끝냈다.

오경헌 감독

하지만 이 영화는 지난해 말 한·일 해협 연안 지역의 작가들이 참가하는 ‘2009 한·일 해협권 무비 어워드’에서 대상을 받은 수준작이다. 이제야 제주에서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뒤늦게 작품성을 인정한 지역방송사들이 최근 오 감독과 영화의 TV방영권 협의에 나섰다. “영화 좀 다운받을 수 없겠느냐”는 전화도 그에게 쏟아지고 있다. 그는 “영화가 좋아 영화를 만들었고, 그저 담담히 제주의 소재를 풀어냈을 뿐인데 어리둥절하다”고 말했다. 고창균 제주영상위원회 사무국장은 “열정만으로 이렇게 제주의 자연과 사회의 단면을 짚어낸 건 놀라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오 감독은 제주독립영화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만큼 ‘지역토종’ 영화에 대한 오 감독의 집념도 대단하다. 미대를 중도에 그만두고 연극배우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1990년대 말부터 거리공연을 벌였다. 3년여 간 200여 차례나 된다. 좁은 극장이 아니라 바깥세상에서 더 많은 바깥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업에 나섰고, 처음 메가폰을 든 단편 ‘머리에 꽃을’이란 작품으로 2001년 지역영상공모전에서 대상인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 요즘 그는 또 다른 장편 ‘뽕돌’의 제작을 준비 중이다. ‘어이그 저 귓것’으로 번 돈은 없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이 “후속작을 지원하고 싶다”고 나서고 있어서다. 오 감독은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누구보다 제주를 잘 표현할 수 있다”며 “제주의 속살을 따라 걷는 ‘올레’ 걷기 여행객들이 쉬고 갈 수 있는 ‘올레 비닐하우스 영화관’을 만드는 게 올해의 꿈”이라고 말했다.

제주=양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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