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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구' 신드롬 왜 거센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영화 '친구' (곽경택 감독)가 영화계를 휩쓸고 있다.

'18세 이상 관람가' 라는 태생적 한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난주 말 개봉 보름만에 전국 관객 3백만명(서울 1백만명)을 돌파했다.

이쯤 되면 '친구 신드롬' 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전염병 비슷하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2001년 봄에 갑자기 찾아온 '친구' 돌풍의 배경은 뭘까.

◇ 무조건 기대고 싶다=이제 '친구' 는 작품 자체로 얘기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섰다. 영화의 미학.완성도를 떠나 사회현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꼴이다. 평소 극장을 멀리했던 '넥타이 부대' 도 점심.퇴근 시간에 영화를 볼 정도다.

회사원 김진석(32)씨는 "요즘 같이 각박한 시대에 믿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친구' 는 생존경쟁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쉼터가 된다" 고 말했다. 하루하루 전투하는 일반인이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탈출하는 도피처 기능을 한다는 것. 특히 요즘의 정치분쟁.경제불안을 감안하면 호소력이 더욱 크다.

문화평론가 이성욱씨는 매사를 사적인 네트워크로 풀어가려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지적했다. 학연.지연에 따른 인맥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는 한국 사회, 그런 환경에서 이른바 '백' 없는 보통 사람이 손쉽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친구라는 것이다.

영화가 각종 이해.조건을 초월한, 즉 친구란 단어가 상징하는 순수성의 코드를 제대로 울렸다는 해석이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는 친구가 아닌가" 라는 대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반면 일상의 고민, 나아가 사회갈등을 공적인 장치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취약성도 보여준다고 이씨는 덧붙였다.

◇ 과거는 정말 아름다운가=이처럼 '친구' 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 속 상처를 매만지는 측면이 있다. 정진홍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티핑 포인트' 이론으로 설명했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맬컴 글래드웰이 정리한 티핑 포인트는 사회적 전염에 관한 과학적 가설. 베스트셀러.영화.TV프로그램 등이 순식간에 주목을 끄는 현상을 가리킨다.

정교수는 " '친구' 는 일종의 바이러스 같다. 이것에 감염되면 얘기가 얘기를 낳는다" 고 말했다.

그리고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지난해 온라인을 달궜던 동창회 사이트 '아이 러브 스쿨' 을 꼽았다. 디지털.정보화 사회의 속도감에 대한 거부감으로 부상했던 아이 러브 스쿨의 바이러스가 그동안 잠복해 있다가 '친구' 를 만나 다시 돌출했다는 것.

그런데 영화에 묘사된 1970~80년대가 과연 성인 남성들이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시대였을까. 문화평론가 조형준씨는 "검정 교복, 짧은 머리로 대변되는 획일적인 학창시절에서 30대 이상의 남성이 절대평등의 원형을 찾는 것 같다" 고 분석했다. 싫든 좋든 교복만 입으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그런 시절, 현재의 자신에선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대한 동경이라는 풀이다.

◇ 비뚤어진 의리의 함정=네티즌 일부에선 준석(유오성)이 동수(장동건)를 살해하라고 사주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건달이 쪽 팔리면 안된다" 는 준석의 성품상 친구인 동수를 죽이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영화의 내용과 매우 거리가 있는 해석이다. 그만큼 관객들은 현대판 영웅담인 '친구' 에서 의리의 중요성을 주목한다. 홍콩영화 '영웅본색' 처럼 땅에 떨어진 의리의 회복을 희구하는 것. 물론 전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다.

제작진 및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점이다. 영화를 만든 시네라인의 석명홍 대표는 "조직폭력배를 미화할 순 없다. 잊어버리고 살았던 우정의 소중함 외에 다른 뜻을 첨가하지 말았으면 한다" 고 말했다.

하지만 비슷한 '주먹영화' 인 '넘버3' '초록물고기' , 그리고 최근 인터넷에 회자된 '다찌마와 리' 에 비해 '친구' 의 폭력세계 묘사가 직접적이고 강렬한 것은 사실. 일상에 함몰된 관객을 공연히 주눅들게 하는 부분이 있다.

이성욱씨는 "아무리 영화라 해도 사나이다움.남성다움을 강조하는 마초 이데올로기는 경계해야 한다" 고 꼬집었다. 다원화.다양화를 생명으로 하는 현대문화의 특성을 잊어선 안된다는 것. "현대인이 상실한 친밀성의 회복을 희구한다는 점에서 남성영화 '친구' 는 결국 일반 멜로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는 문화평론가 서동진씨의 지적도 흥미롭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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