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아기 낳고도 학교 다닐 수 있어” 배 속 아이 심장소리가 내게 힘을 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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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재학 때 임신해 퇴학 위기에 몰렸던 김수현양이 백일을 맞은 딸 시은이를 안고 있다. 김양은 인권위의 권고 덕분에 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했다. [김성룡 기자]

예정일이 지났는데 생리가 시작되지 않았다. 몸 상태도 이상했다. 소화가 안 되고 화장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만난 지 9개월 된 남자친구의 집에서 임신 테스트를 했다. 결과를 본 강화여고 3학년 김수현(당시 18세)양은 “눈앞이 캄캄했다. 진단 키트를 붙들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2009년 4월 4일 토요일이었다. 한참을 울던 수현양은 남자친구 최호성(당시 25세)씨와 함께 집 근처 마니산에 올랐다. 9개월째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는 “낳아서 키우자”고 했다. 하지만 수현양은 “나 대학 가야 하는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에겐 세무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낙태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체해도 약을 먹지 않았다. 몸 안의 아기에게 해로울 것 같았다. 생각과 달리 몸은 이미 엄마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일주일 뒤인 11일 남자친구와 함께 병원을 찾아 6주 된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수현양에게 말처럼 들렸다. “아기도 낳을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다. 엄마도 될 수 있고, 대학생도 될 수 있다.” 그 순간 수현양은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다.

13일 체기를 느낀 수현양은 양호실에 들러 ‘까스활명수’를 달라고 했다. 임신을 해도 활명수는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양호교사는 다른 알약을 내밀었다. “선생님, 저 그 약은 못 먹어요.” 이상하다고 느낀 교사가 이유를 캐물었다. 망설이던 그는 임신 사실을 털어놨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음 날 담임교사가 그를 불러 “전학을 가거나 자퇴해야 하니 부모님을 모셔 오라”고 했다. 남자친구 최씨가 각자의 부모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최씨와 수현양의 오빠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부모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수현양의 어머니 양경애(47)씨는 학교로 찾아가 “딸이 공부를 계속하게 해 달라”며 교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양씨는 “내가 못 배운 탓에 세상을 너무 어렵게 살아 딸만큼은 공부를 많이 해 잘살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학교는 ‘생활규정’을 복사해 내밀었다.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학교의 명예를 훼손한 학생 또는 불건전한 이성 교제로 풍기를 문란하게 한 학생에 대해서는 퇴학 조치를 할 수 있다’고 써 있었다. “퇴학당하면 검정고시도 못 본다. 남자친구를 형사고발할 수도 있다.” 교사의 말에 양씨는 할 수 없이 자퇴서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양씨는 4월 28일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았다. 인권위가 학교 설득에 나섰지만 학교는 ‘재입학 불가’ 입장을 알려 왔다. 교직원·학부모회 임원 등이 투표로 의견을 모은 결과 수현양의 학적 회복을 절대 다수가 반대한다는 이유였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결석일수가 총수업일수의 3분의 1을 초과하면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따라 유급되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진정이 접수된 지 두 달여 만인 7월 6일, 학교에 대해 시정권고 결정을 내렸다.

수현양은 이 권고 후 7월 13일자로 강화여고에 재입학했다. 학교 측과 상의해 소속은 강화여고에 두되 수업은 대안학교에서 받기로 했다. 1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과학 선생님이 가까운 대안학교를 소개해 줬다. 유난히 질문이 많던 과학부장 수현양을 예뻐하던 선생님이었다. 수현양은 만삭인 상태에서도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빠짐없이 학교에 나갔다. 그의 고교 3학년 출석일수는 총수업일수의 3분의 2를 훌쩍 넘었다.

12월 8일, 3일 동안의 진통 끝에 딸 시은(施恩)이 태어났다. 이름처럼 엄마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아이다. 아이가 태어난 뒤 수현양은 김포대학 세무회계정보과에 합격했다. 그는 “아기의 심장 소리가 들려줬던 그 꿈이 현실이 됐다. 지금 목표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17일은 시은이의 백일이다.

글=김진경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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