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10시간] '동물원' 음악엔 사람냄새 물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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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최근 동물원에 가보신 게 언제입니까.

이상도 해라. 어린 시절 제가 즐겨 찾던 고향의 동물원에는 개가 한마리 있었습니다. 코끼리나 바다표범이 아니라 그냥 '개' 입니다. 길이가 2m도 넘는 거대한 뱀, 던져주는 과자를 잘도 받아먹던 털빠진 원숭이도 좋았지만 동물원에 가면 가장 먼저 그 개부터 찾았습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흰색 잡종이었던 그 개가 동물원에 있었던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불구인지 다리가 하나 없었는데요, 어쩌면 세 다리로 잘도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물원에 살았을 그 개가 지금도 가끔 생각납니다.

그룹 동물원은 이를테면 그런 아련한 추억 속의 동물원과도 같은 그룹입니다. 동물원과 10시간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해 이사하면서 아파트 베란다 한쪽에 치워놓은 오래된 레코드 더미를 뒤졌습니다. 한참 동안 먼지를 털어내고 마침내 손에 잡은 그리운 음반들.

이젠 더이상 들을 수 없는 김광석의 목소리가 생생한 '거리에서' 가 들어 있는 첫 음반이 나온 것은 분명히 1988년으로,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해입니다. 노량진의 한 학원에서 재수를 하고 있던 저는 다리가 세 개뿐인 개가 사는 고향의 동물원을 그리워하며 그룹 동물원의 음반을 몇번이고 되풀이해 들었습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같은 아름다운 노래들이 들어 있는 노란색 표지의 2집에는 '동물원' 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쓸쓸한 휘파람 소리가 인상적인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동물원을 만나러 대학로로 향했습니다. '동물원에 가 보았지. 추워 움츠린 어깨로.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두리번거렸지(…)고무 풍선을 움켜쥔 아이와 하품하는 사자들과 우리 안을 맴도는 원숭이는 지나온 내 모습이었지' .

지난 11일 밤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에서는 다음날부터 4일간 계속된 콘서트 '동물원 신춘음악회' 의 공개 리허설이 있었습니다. 콘서트의 막을 올리기 전날, 마지막 리허설을 팬들이 보는 가운데 진행하는 겁니다.

이 번 리허설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청각.시각 장애인과 자원봉사자 등 1백30명이 초대된 것입니다. 듣거나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콘서트. 멋있지 않습니까. 수화 자원봉사자 네 명이 무대 한쪽에서 교대로 가사를 수화로 전달했습니다.

바이올린과 첼로, 오보에와 피아노 반주로 부드러운 무대가 마련됐습니다. ' 오늘은 잊고 지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첫 노래 '혜화동' 을 듣고 있으니 문득 옛 친구들이 그리워졌습니다.

인터넷 회사에 다니는 신수진(27)씨는 94학번. "사람 냄새가 나고 맑은 노래들이 좋아서" 동물원을 사랑하는 그녀는 공개 리허설을 보기 위해 월차 휴가를 내고 친구와 함께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8집 노래들 가운데 "헤어진 뒤에도 사람을 사람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곡 '너에게 감사해' 가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 를 마지막으로 막이 내려오자 팬들은 엄청나게 큰 박수로 앙코르를 청했고 '거리에서' 가 준비됐습니다.

동물원은 멤버 김광석이 죽은 이후 대부분 공연에서 앙코르곡은 그가 보컬을 맡았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김광석씨 생각 많이 하시나요□" 라는 질문은 끝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꼭 묻고 싶었지만 왠지 바보같은 질문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리허설이 끝난 대학로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고향, 동물원, 친구들, 어린 시절….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최재희 기자

***'다섯명으로 출발 지금은 셋만 남아 김창기 곧 합류'

김광석.김창기(37).박기영(36).배영길(36).유준열(37) 등 다섯 명의 멤버로 구성됐던 동물원에는 이제 박기영.배영길.유준열 등 세 명만 남아 있다. 솔로로 독립한 뒤에도 동물원의 음반에 꼭 한두곡씩 참여했던 김광석은 다섯해전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등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만든 김창기씨는 소아정신과 전문의. 지난해 독집 앨범을 냈다.

나머지 세 멤버 가운데 박기영.배영길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음악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박기영씨는 전지현.박신양 주연의 영화 '화이트 발렌타인' 의 배경 음악을 만드는 등 영화 음악에 관심을 쏟고 있으며, 배영길씨는 앨범 프로듀서로도 활약하고 있다. 유준열씨는 여전히 직장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김창기씨는 다음 앨범부터 합류한다고 한다. 8집 앨범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지난해 독집을 냈던 그가 중복 활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이다.

동물원의 앨범에서 고인이 된 김광석에 이어 김창기씨의 목소리마저 들을 수 없어 아쉬워했던 많은 팬들에겐 기쁜 소식이다. 홈페이지는 (http://zoo.chi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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