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공짜 점심은 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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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무료 급식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개인이 해야 할 일과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구별되어 있다. 치안과 국방을 맡고, 다리와 댐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는 일 등 개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은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대신 해 준다. 그러나 국가가 그 한계를 넘어 개인의 생활까지도 책임지겠다고 나온다면 그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 포괄적 복지이지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한편 무료 급식은 배급 장면을 연상케 한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우리 아이들이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는 것과, 식량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북한 주민이 그 내용 면에서는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내 아이의 점심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개인의 독립이며 자존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는 것이지 국가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이유로 아이의 점심을 책임질 수 없는 가정도 있다. 생활보호 대상자도 있다. 그들은 별도의 배려를 해 주어야 한다. 무료 급식을 받는다고 차별을 받아도 안 될 것이다. 티가 안 나게 운영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공짜 점심은 국민 의식의 수준에서 단순하게 점심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의식주를 포함해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 독립적인 개인은 사라지고 의타적인 인간만이 넘치게 된다. 이에 비례해 국가의 간섭은 심해진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은 시혜를 베푸는 국가에 반납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북한처럼 나라에서 먹여주고 입혀 주는 대로 살 것인가? 공짜 점심이 시행된다 가정해 보자. 분명히 이를 내건 정치인들은 자기 덕에 우리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다고 공치사를 할 것이다. 그들이 점심을 주었는가? 아니다. 우리의 세금이다. 세금은 국민이 내고 생색은 정치인들이 내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효율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내 돈으로 점심을 사 먹는 것과, 내 돈을 국가에 내서 국가가 그 돈으로 점심 값을 내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효율적인가? 국가가 한다면 누군가 돈을 관리해야 하고, 이를 맡은 사람들에겐 특권이 생긴다. 때로는 낭비와 부정이 따를 수도 있다. 사회주의가 겪어온 부작용들이다. 개인의 선택도 무시된다. 왜 누구나 똑같은 메뉴의 점심을 먹어야 하는가? 떡을 싸 가고, 샌드위치를 싸 가면 안 되는가? 그것이 개인의 다양성이다. 우리 집 아이들의 경우, 때때로 학교 급식 메뉴가 지루하다며 도시락을 싸간 적도 많다. 그런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뒤늦게 개인의 취향을 무시하고 획일주의로 나가려는 걸까? 개성을 강조하면서 가장 개인적인 먹는 것부터 똑같음을 강요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그게 바로 가난을 이용하는 위선이며 포퓰리즘인 것이다. 무료 급식을 반대한다는 한나라당은 ‘왜 부자들에게까지 공짜 점심을 주느냐’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는 가난을 이용하는 포퓰리즘과 똑같이 부자를 때리는 또 다른 포퓰리즘인 것이다.

내 아이의 점심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부자냐, 가난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부모의 당연한 책임이자 정성을 쏟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권리다. 자녀 양육 문제에서 가정의 책임이 무너진다면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국가나 권력이 나설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 의존형 인간들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지켜 낼 수 있을까? 그런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할까? 결국 전체주의, 공산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지는 않을까? 개인이든 국가든 진정한 번영은 독립심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무료 급식 문제는 단순하게 먹는 문제, 편리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자 이념의 문제다. 공짜 점심 한 끼로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팔 수 없다. 공짜 점심이 혹시 실현된다면 ‘내 아이는 내가 먹이겠다’는 도시락 싸가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그것이 가정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초를 지키는 일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