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난곡' 현장 리포트] 3. 까마득한 구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생산적 복지' 의 뼈대는 자활이다. 정부는 빈곤층의 자립을 돕기 위해 자활공동체 창업이나 자활근로 지원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대책은 주저앉은 빈곤층을 일으켜세우기에 역부족이다. 전문가들은 "모양새만 갖춘 자활이 아닌, 수혜층의 욕구를 정확히 담아낼 내실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고 지적한다.

◇ 어느 자활공동체의 '맨주먹 신화' 〓난곡 초입에 있는 나눔물산(봉제업)은 자활공동체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빈곤층의 성공 사례를 직접 보면서 애로 사항을 알고 싶다" 며 그동안 보건복지부 장관 5~6명이 다녀갔을 정도다. 하지만 이 자활공동체의 성공 신화는 정부 지원보다는 초인적인 자활 의지의 결과물이었다.

나눔물산이 문을 연 것은 1996년 10월. 저소득층 주민 10여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기초적인 노하우가 없었던 이들에게 현실은 냉혹했다. 창업하기 전 이들은 자활후견기관에서 임대보증금.설비비로 3천여만원을 빌리고, 장부 적는 방법 등을 배웠다.

하지만 정작 사업을 벌이자 경영자문이나 추가 자금을 지원받을 곳이 없었다. 원청업체의 부도까지 겹치면서 결국 두달여 만에 1억6천만원의 빚을 지게 됐다. 그래도 정부의 도움을 받을 길은 없었다. 지방자치단체 발주사업도 거의 경쟁입찰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영세 자활공동체가 명함을 내밀 곳은 없었다.

"이렇게 하다간 영영 망하고 말 것" 이라고 생각한 전직원은 맨발로 뛰기 시작했다. 일감이 있다고 소문난 곳은 어디든 찾아가고, 자정이 지나도록 열심히 일했다. 4년여를 이렇게 버텨왔는데, 요즘은 일감이 뜸해 근근이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다.

문양임(37.여)대표는 "자활공동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일감을 알선해주는 등 정부의 도움이 필수적" 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성공한 자활공동체라고 부르지 말라" 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일감이 떨어지면서 자본 없이 시작한 전국의 상당수 자활공동체들이 넘어지고 있다. 실제 생산 자활공동체 1호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서울 노원구의 봉제업체 '실과 바늘' 도 지난 2월 말 문을 닫았다.

◇ 주저앉는 30대〓최세진(가명.33)씨의 난곡 생활은 올해로 3년째. 97년까지만 해도 건설현장 용접공으로 월 1백만원 이상 고정수입을 올렸지만 외환위기 이후 일감이 없어지자 방값이 싼 난곡으로 옮겨왔다.

어떻게 하든 직장을 잡아 이곳을 벗어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일자리 찾기는 마음 먹은 만큼 쉽지 않았다. 그러다 비상금은 동나고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됐다.

마지막 희망이던 기초생활보장제마저 그를 외면했다. 근로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전치 2개월 이상의 진단서를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병.의원에서는 관행이라며 3~4주짜리 진단서에 '장기치료를 요함' 이라고만 첨부했다. 동사무소측도 "사정은 딱하지만 서류 위주로 진행되는 감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 그는 "이러다 폐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며 고개를 떨구었다.

◇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관악자활센터는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센터는 1996년 일용직 노동자가 많은 난곡.봉천동 주민들의 특성을 감안해 건물 보수를 전담하는 자활공동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곳곳에 암초가 있었다.

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르면 정부는 자활공동체에 관급공사를 우선 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건설 관련법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사는 경쟁입찰을 거치도록 해 사실상 자활공동체의 우선 발주를 가로막고 있었다.

센터측은 좀더 큰 공사를 따내기 위해 종합건설업으로의 업종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장애물은 또 있었다. 자활공동체로 인정받으려면 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권자가 3분의1 이상 참여해야 하지만 저기술.저학력인 수급권자가 그만큼 들어갈 경우 많은 기술인력이 필요한 종합건설업으로의 변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센터측은 이 공동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활공동체 지정기관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자활근로 포기〓40대 초반의 金모씨는 요즘 공공근로에 맛을 들였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전국 곳곳의 공사판을 훑던 그였다. 하지만 최근 웬만하면 어려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힘들고 다치기 쉬운 노동이나 머리 아픈 사무직보다는 쉽게 일할 수 있는 공공근로가 체질에 맞기 때문이다.

주민 崔모씨는 "외환위기 이후 쏟아지다시피 들어온 구호물자와 공공근로사업이 일부 청.장년층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고 말했다.

난곡의 저소득층을 관할하는 신림7동사무소는 지난해 10월 기초생활보장제가 실시된 후 자활근로.직업훈련 등을 전제로 한 조건부 수급권자 중 17명의 명단을 고용안정센터에 넘겼다. 사전 면담에서 가장 젊고,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판정된 경우였다.

그러나 벌써 여덟명이 탈락했다. 자녀 양육.노인 부양 등의 이유가 많았지만 "관심이 없다" "시간이 없어서" 라는 경우도 있었다. 한 30대 수급자는 "귀찮다" 며 직업훈련을 거부해 결국 조건부 수급권자에서 탈락했다.

사진=박종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