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예스' 라 말할 수 있는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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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지금까지 한번도 만난 적도 없고 또한 나보다 12세나 위인 귀하에게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귀하가 지금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도쿄 주지사의 현역 정치가라기보다 한때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소설가였기 때문입니다.

*** 소설가 이시하라의 변신

귀하는 대학시절 유도와 축구에 열중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며 22세의 나이에 쓴 '태양의 계절' 이란 소설로 아쿠다가와(芥川)상을 받음으로써 문단의 기린아가 됐습니다.

한때 직접 감독도 했고, 배우로도 출연했던 귀하는 일본의 국민배우였던 동생과 더불어 사교계의 총아가 됐으며, 정치에 진출해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객 중의 한사람이 됐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귀하의 가문을 미국의 케네디와 비교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최근에 읽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귀하를 떠올릴 때마다 '태양의 계절' 의 작품 속에서 사랑하는 애인에게 자신의 남근(男根)을 문창호지 사이로 찢어 넣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마침내 전후시대의 저항심을 상징하는 '태양족(太陽族)' 의 선두주자였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귀하를 향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이렇게 평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시하라는 모든 지적(知的)인 것에 대해 모멸의 시대를 열었다. 전전의 군부독재시대는 지적이 아닌 세력이 지적인 것을 모멸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시하라가 연 시대는 그때와 다르다. 그것은 지적인 내란(內亂)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미시마의 평대로 귀하는 허위에 가득 찬 거짓에 대해 저항함으로써 지적 반란을 일으킨 혁명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귀하는 자신의 입장을 진보주의자로 일관시킴으로써 강대국 미국에 대해선 'NO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를 부르짖고, 또한 교과서 왜곡에 대한 중국과 한국의 끊임없는 분노를 '내정간섭' 이라고 평가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시하라, 귀하만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일본의 모리 총리를 비롯해 각료 7명이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을 앞세워 대동아전쟁을 미화하고, 중국과 한국에 끼친 깊은 상처를 숨기려는 시대착오적인 퇴행행위를 벌이고 있다 하더라도 이시하라, 귀하만은 '내정간섭' 이라는 극우적인 평가를 내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하는 어쨌든 한때 인류애를 부르짖었던 소설가였으며, 또한 일본의 군국주의적 허위에 대해 강렬히 저항했던 태양족의 선두주자이지 않았습니까.

한국은 일본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국은 귀하가 쓴 소설 '완전한 유희(遊戱)' 에 나오는 정신병에 걸린 여인처럼 집단적으로 윤간을 당했습니다.

또한 36년간이나 일본의 군국주의에 귀하의 소설 '처형실(處刑室)' 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처럼 집단린치를 당하고, 말과 이름을 뺏기고 꽃다운 처녀들은 정신대란 이름으로 창녀가 됐습니다.

그러나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8.15의 패전으로 해방은 됐으나 남과 북으로 나뉘어 아직까지 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분단국가가 됐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패전했다면 일본이 마땅히 독일처럼 두개의 국가로 나뉘어져야지 어째서 당사국이 아닌 한국이 두개의 분단국으로 나눠져야 했던가요.

*** 韓.中 충고에도 답할 차례

도대체 일본은 어떤 나라입니까. '좋은 약은 입에 쓰다' 라는 속담을 가진 나라 일본. 그러나 이웃나라 중국과 한국의 입에 쓴, 그러나 몸에 좋은 충고를 결코 좋은 약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폐증에 걸린 일본.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해보지 않는 미숙하고 유치한 감정을 가진 일본.

이시하라 신타로, 귀하는 강대국 미국을 향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를 부르짖음으로써 일본인의 자존심을 세워줬습니다. 그러나 귀하가 진정 자유인이라면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상가가 돼야 할 것입니다.

이웃나라 한국과 중국의 충고를 내정간섭이 아니라 좋은 충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 일본인에게는 최고의 양약인 이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아는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에 대해서도 이제는 성숙한 지성인으로서 귀하가 자폐의 창호지를 찢고 한마디 할 때가 됐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인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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