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 생각은…

중국 '시장경제 지위' 획득에 대비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한국이 드디어 수출액 2000억달러를 돌파했다. 은둔의 나라 이미지를 갖고 국권을 잃고 식민 지배를 경험하다 냉전의 피해자가 됐던 한국이 불과 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한국과 세계경제사에 역사적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1964년 한국은 수출액 1억달러에 불과했던 은둔과 절대 빈곤의 나라였다. 하지만 이제는 2004년 기준으로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했다.

한국이 이렇게 성장한 데는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와 국제 정세의 도움이 있었다. 초창기 미국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의 정세를 돌이켜 보면 중국이 주는 기회가 절대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시장경제 실험의 확대와 속도, 그리고 성격은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 경제질서에 있어 성장하는 경제의 견인차이자 엔진 역할을 하고 있고, 이것이 한국의 미래에도 심대한 영향을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칠 것임이 틀림없다.

한국의 정치권이 국가경영을 백년대계가 아닌 정파적 이해라는 소아적인 잣대로 재단해 각종 정책이 표류하는 동안 중국의 국가주석이자 당 총서기인 후진타오(胡錦濤)는 최근 중국 권력의 핵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마저 장악함으로써 이제 권력을 둘러싼 소모적인 투쟁을 종식하고 강력한 경제대국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대내외적인 정책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가시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약 25여년에 걸친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이래 2001년 숙원 목표이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가입 후 15년간 시장경제국 지위의 유예라는 굴레를 동시에 부여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요즈음 중국의 각종 매체에서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비(非)시장경제 지위"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통상분쟁, 특히 덤핑 여부가 쟁점일 경우 중국처럼 비시장경제 지위를 보유한 국가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한다. 덤핑 여부가 자신의 국내 원가에 기초하지 않고 시장경제 지위를 가진 소위 '대체국'의 가격과 비용을 토대로 판정됨으로써 패소율이 높아짐은 물론 고율의 관세를 물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최근 7년간 반덤핑 피소건 1위라는 불명예를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의 대외 수출에 직접적 타격을 줄뿐 아니라 중국의 대외신용도에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에 중국은 전방위적으로 각국에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올해 뉴질랜드.싱가포르.말레이시아.키르기스스탄.태국으로부터 그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에 고무돼 중국은 유럽연합(EU)에 시장경제 지위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지난 6월 유럽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중국이 정부 간섭, 기업지배구조, 금융개혁 부문 등에서 국제 기준에 미흡함을 들어 승인을 거부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중국에 우호적인 EU로부터 시장경제 지위를 이끌어내고, 최대 시장인 미국과 지위협상을 타결해 대외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중국의 의도에 좌절을 안겨준 것이다.

이에 중국은 한국이 세계 제12위 교역 대국이자 중국의 제5위 교역 상대국이라는 상징성에 주목해 10월 7일 하노이에서 열린 제5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에서 한국 정부에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고, 한국은 처음으로 중국 경제의 성격을 규준하는 표준의 선택자 역할을 떠맡게 됐다.

세계가 한국의 선택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표준의 선택자 역할을 맡은 한국이 과연 독자적으로 중국 경제의 성격을 자국의 장기 전략에 맞춰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아마도 이를 적어도 내년도 11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전에는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대외 통상환경에서 제1위 교역국이자 최대 무역 흑자국인 중국 변수는 매우 크다. 세계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자인 중국이 비시장경제 지위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고 거침없이 한국 및 세계시장에 진출할 때의 경쟁력 변화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대응 방안의 모색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을 요한다. 정부와 학계가 중국 경제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해 국제사회에 대답할 시간이 별로 없다.

박병인 한국외대 중국어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