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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兎)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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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국공(國共)은 1949년 4월 1일부터 베이핑(北平)에서 평화협상을 벌인다. 기간은 20일. 장제스(蔣介石)는 끝내 서명을 거부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은 21일 제2, 제3 야전군에 창장(長江) 도하를 명령한다. 이른바 도강(渡江)대첩이다. 백군(白軍)은 연전연패, 결국 대만으로 쫓겨간다.

붉은 대륙이 됐지만 국민당 잔존 세력은 여전히 강고했다.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가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보다 앞서 열린 이유다. 정협은 일종의 정치적 기만전략이다. 공산당 독재임에도 무당파(無黨派)·국민당 등과의 연합 정권임을 보여주기 위한 기구이기 때문이다. 건국 전인 49년 9월 21일 열린 1회 정협이 개막 엿새 만에 결의한 ‘공동강령’이 공산 중국 최초의 헌법이다. 베이핑은 이때부터 베이징(北京)으로 개칭된다.

10월 1일 정부 수립 후 첫 인선을 보면 기만은 한층 도드라진다. 6명의 국가 부주석 가운데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국민당의 리지선(李濟深), 민주동맹의 장란(張瀾) 등 3명이, 4명의 부총리 가운데 황옌페이(黃炎培), 궈모뤄(郭沫若) 등 2명이 비공산당원이다.

최초의 전인대는 54년 9월에나 열린다. 양회(兩會-전인대와 정협)시대의 개막이다. 이때부터 양(羊)의 탈은 사라진다. 1회 전인대에서 구성된 인사 가운데 부총리급 이상에선 쑹칭링만 유일한 당외 인사다. 전인대는 철저하게 일당 독재를 수행하는 민의기구로 작동한다.

이런 형편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국정 견제 기능이 살짝 입혀지긴 했지만 전인대는 당 결정을 추인하는 기구다. 특히 인사안은 100% 가결이다. 주머니가 불룩해진 중국 인민이 이를 용납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나온 신조어가 ‘투(兎)회’다. 양회의 ‘양’은 영어로 ‘투(Two)’다. 한데 ‘兎’의 중국 발음이 ‘투’다. 그래서 ‘兎會’다. ‘토끼처럼 담이 작은(膽小如兎) 양회’란 비아냥이다. 담이 작아 당 결정에 고분고분하다는 질책이다.

우리 국회는 반대다. 담이 너무 커서 걱정이다. 2월 국회는 합의한 안건조차 처리 못했다. 조두순 사건 후 발의된 아동 성폭력 관련 법안 20여 건은 아직도 계류 중이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대단한 담력이다. 어제 여중생 성폭행 살해 사건 피의자인 김길태가 붙잡혔다. 늦게라도 붙잡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담 큰 국회를 틈타 제2, 제3의 김길태가 나타날까 무섭다.

  진세근 탐사 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