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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정빈장관의 말뒤집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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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러시아.미국과의 정상외교 교섭과정에서 러시아는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미국은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각기 제기해 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던지고 있다. 이정빈(李廷彬)외교통상부장관은 어제 한 정책포럼에서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한.미간에 별 문제가 없다는 식의 논지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교섭기밀을 발설했다.

李장관은 파문이 일자 미국이 NMD 지지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NMD 문제를 제기한 것을 잘못 말했다고 둘러대고, 러시아의 주한미군 철수 제기 시도는 국익을 위해 보도자제를 당부했다. 외교사령탑이 교섭기밀을 섣불리 발설했다가 금세 번복하는 행위는 판단력 결여라기보다 자질문제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 왜 우리에게 NMD 지지를 요청했으며, 러시아는 왜 느닷없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려 했느냐는 등 양국의 의도가 무엇이며, 우리 정부는 그에 대해 어떤 대응책을 수립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그에 대해 정부는 엉뚱한 둘러대기나 하고 국익을 빙자해 보도자제를 당부할 것이 아니라 그 전후사정을 상세히 밝혀야 한다. 그것은 한.미간, 한.러간의 이해(利害)가 상충하는 것이 현실화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미.러간의 치열한 각축이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어서 우리 외교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우리 외무장관은 지난번 한.미 정상회담을 헝클어 놓았던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과 관련한 한.러 정상회담 성명에 대해 장황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려다가 '털어놓지 않아야 할' 극비 교섭사안을 밝혀 외교적 입지를 스스로 좁힌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할 말 안 할 말을 가리는 게 외교적 언술의 기본이다. 변명→주워담기→변명으로 이어지는 외교 수장의 최근 행태를 보면서 우리 외교의 어두운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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