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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필리버스터 제도 도입 검토해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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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필리버스터는 의원이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반대의견을 가진 의원에게 양보함이 없이 무제한의 토론과 수정을 요구하며 발언하는 것이다. 이 절차는 의회 토론에서 소수자 권리 보호, 의안의 충실한 심의, 정파 간 타협의 유도라는 명분 아래 마련되었다. 양원제에서는 “찻잔 받침처럼 하원의 열정을 식히는” 견제장치로서도 의미가 있다.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는 토론 종결 동의(動議)는 상원의원 60인의 찬성을 확보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최근 아이오아주 출신으로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킨 민주당 상원의원은 토론 종결 동의의 가결 요건을 51인 찬성으로 완화하는 규칙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필리버스터를 폐지하거나 약화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상원의원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글을 발표한 학자나 칼럼니스트를 찾기도 어렵지 않다. 필리버스터는 과거에 비해 남용되고 있다. 빈번한 필리버스터 때문에 상원 입법과정이 거듭 교착, 지연된다. 싱클레어 교수에 의하면 1960년대 중요 법안의 8%가량이 필리버스터 대상이었지만 2000년대에 와서 70%가 그러하다. 필리버스터를 봉쇄 내지 중단시키기 위한 토론 종결 표결도 급증하여 현 111대 연방의회의 1년 남짓한 시기에 40건을 상회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은 공화당의 필리버스터로 말미암아 국정운영이 난항을 겪고 있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필리버스터를 중간선거의 정치 쟁점으로 부각시켜 민주당 지지자들의 여론을 환기할 태세다. 반면, 필리버스터 유지론도 만만치 않다. 잦아진 필리버스터는 정치 양극화의 결과이지 문제를 빚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절차는 상원이 소수 의사를 수렴하여 보다 많은 국민이 수용하는 법을 만들 수 있게 한다고 주장된다.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이 결국 무산된다면 필리버스터의 폐지 내지 약화 주장은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일반 유권자들은 의사절차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의안 상정과 토론을 주도하는 리드 민주당 원내대표가 하킨 상원의원에게 동조하지 않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는 민주당이 필리버스터로 공화당 발목을 잡던 소수당 시절을 망각했다고 꼬집는다. 상원 규칙의 변경은 67인 특별 다수의 찬성이 필요하다. 필리버스터가 폐지 내지 약화되기란 쉽지 않다.

필리버스터 절차가 한국 국회의 운영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인가? 권영진·박상천·유정복 의원은 각각 쟁점 법안을 둘러싼 여야 극한 대결과 입법과정의 파행을 해소하는 방안으로서 필리버스터와 조정절차를 도입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였다. 이 3개 법안이 운영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다수 의사의 일방 강행으로 인하여 자주 첨예한 갈등이 빚어진 국회 무대의 현실에 비추어 쟁점 법안을 심의할 때 발언 횟수와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는 절차는 필요하다. 토론을 활성화하여 심의의 충실성을 기하는 한편 다수 지배와 성과 산출로써 입법 효율성도 제고하는 균형적 관점에서 국회 나름의 필리버스터 절차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위원회나 본회의에서 법안 상정부터 표결에 이르기까지 의사진행이 물리적으로 원천 봉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위원회나 본회의에서 정해진 법안처리 기한 내에서 필리버스터를 허용할 수 있다. 필리버스터는 본회의장에서만 행하도록 하여 심사과정이 지나치게 지연될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 입법의 효율성보다는 신중성을 우선하는 미국 상원에서는 의원 1인 단독의 필리버스터가 진행될 수 있으나 국회에서는 재적 의원 5분의 1 이상 요구로 가능하도록 해야 바람직하다.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토론 종결을 하고 필리버스터의 개시와 함께 조정절차도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필리버스터 절차가 국회운영 제도로서 도입된다면 여야 정당의 의원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하고 규정을 준수하면서 법안심의의 질을 제고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박찬욱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