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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무소유'로 숱한 인재 키운 참스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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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국치(國恥)의 한(恨)을 곱씹던 일제 점령기. 광복의 여명(黎明)은 저만치에 있고, 이 땅엔 제복과 서슬 퍼런 칼날만이 교단을 뒤덮던 1930년대.

그 시절에도 나라 잃은 설움을 이겨내려고 보따리 가방을 멘 아이들은 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학교에 다녔고, 교사들은 가르침을 천직(天職)으로 삼고 교육열을 불태웠다.

지난 18일 93세로 타계한 녹원(綠園) 이창우(李昶雨)옹은 암울했던 그 때 그 시절 교단에 올라 60년간 쪽빛보다 더 진한 참교육을 실천한 '선생님' 이었다.

1908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충북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28년 진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육자로 입문, 54년 서울사대부국을 시작으로 청주중.서울 경서중.원주고.서울 경성중 등의 교장을 지냈다. 70년 교직을 떠난 뒤에도 『사회생활과 자료』등 저서를 남기면서 사회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존경받는 교육자가 으레 그렇듯 그도 자신을 세상에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제자.자녀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인사로 키웠다. 김종량 한양대 총장.조정원 경희대 총장.홍석현 중앙일보 회장.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정대철 민주당 최고위원.정근모 호서대 총장.김명자 환경부 장관 등이 대표적인 제자. 상혁(69.전 한화골든벨 사장).상훈(67.재향군인회장.전 국방부 장관).상문(61.미 네브래스카대 교수).상륭(59.용산역개발 부사장).상철(53.한국통신 사장)씨 등 7남1녀도 훌륭하게 키워냈다.

"법정(法頂)스님의 『무소유(無所有)』를 읽고 나는 공감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훌륭한 제자를 두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 없다. "

지난해 스승의 날 서울사대부국 제자들이 은사였던 李옹을 초대한 자리에서 그는 식지 않은 교육열을 털어놓았다.

조정원 총장은 "선생님은 『채근담』을 자주 인용하시면서 '고목은 볼품이 없지만, 그 그늘은 모든 이에게 안식을 준다' 는 철학을 갖고 계셨다" 고 회상했다. 정대철 의원은 "강직하고 곧은 삶을 산 선비셨다" 며 "아이들에겐 따뜻했지만 교사들에겐 서릿발 같았다" 고 기억했다.

"학교 교육이 왜 이렇게 됐나.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학교를 믿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 책임은 자네들 잘못이야. 교육 초심(初心)으로 돌아가게. "

그를 따르는 교사들의 모임인 '녹우회(綠友會)' 의 구본혁(60)서울예고 교사는 "교육이 잘못된 길을 갈 때면 무릎 꿇은 제자들이 오금이 저리도록 질타하셨다" 며 "그 나이에 인터넷을 배워 후배들에게 e-메일을 보내셨을 정도" 라고 전했다.

자식들에겐 정직(正直)을 신조로 삼게 했다. 상훈씨가 율곡비리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고인이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옛말에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치지 말라고 했다. 너는 깨끗하다고 하지만 주위에선 이를 믿지 않는다. 네 부덕(不德)의 소치로 여기고 반성하라. "

고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지고지순했다. 93년 아내 방덕순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백일홍』을 발간해 영전에 바쳤다. "나는 냉철한 사람인데, 매일 당신 사진 앞에서 산 사람에게 말하듯 웅얼거리면서 눈물을 훔칠 때가 많다. " (『백일홍』중에서)

이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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