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분통 터지는 샐러리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두달 뒤 파산이 확실한 기업에 특혜 금융과 사채까지 끌어다 주고 채권자들에게는 돈받을 엄두도 내지 말고 추가 투자만 하라고강제하는 꼴 아냐?"

"의약분업 후 동네의원 의사들 한달 평균매출(2천2백99만원)이 38%나 늘었는데 봉급생활자들은 누구를 위해 언제까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거야. "

오는 5월이면 의보재정이 바닥을 보일 것이라는 정부 발표가 있은 뒤 봉급생활자들의 불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

경제전망이 밝지도 않은 이 봄날, 국민정서는 가뭄 끝자락의 논바닥처럼 점점 거칠고 메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의료보험 정책의 총체적 실패에 분통이 터지지만 마땅한 대처방법조차 없어 화가 더욱 치민다. 월급여에서 의보료를 세금처럼 원천징수 당한 지 이미 오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책 실패를 자인하는 것을 보니 사정이 심각하기는 어지간히 심각한 모양이다. 오죽하면 시민사회단체까지 의보료 납부거부 등 거센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까.

정부가 꼽는 의보재정 파탄 원인은 크게 두가지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의약분업과 '저부담 고급여' 방식으로 설계된 의료보험 모델이 그것이다. 의약분업을 전후 해 1999년 11월부터 지난 1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수가(공단이 의료기관에 지급하는 진료비)가 41.5%나 인상됐다. 한달에 수백억원에 불과하던 약국 지급액(보험급여비)도 4천억원으로 늘어났다. 의약분업 도입 후 수입(보험료와 국고보조금)보다 지출(병.의원과 약국에 지급한 보험급여비 등)이 많아져 재정이 바닥을 보였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 직장의보료 21.4%, 지역의보료는 15%를 각각 인상했지만 5월 이후에도 의약분업과 의보제도를 유지하려면 보험료를 20% 가량 추가 인상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1조2천억원 가량 남은 국고지원금도 바로 쏟아붓고, 조제료.처방료를 하향 조정하거나 없애는 계획도 검토한다. 국민보험공단과 건강심사평가원의 기능을 강화하고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도 엄하게 대처하겠다는 방안까지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조차 동의하지 않는다. 미봉책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우선 내년 1월 직장의보와 지역의보가 통합되면 봉급생활자들은 한번 더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한다.

지역의보 적자를 직장의보 가입자들이 메워야 의보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에 관한 한 봉급생활자들은 끝없는 희생만을 강요당하는 셈이다.

제반 여건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준비도 없이 밀어붙인 정책으로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데 정작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정부가 진심으로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책임자를 문책한 뒤 이 정책을 접어 들이거나 굳이 추진하겠다면 방향과 속도, 방법 등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면 될텐데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같은 국민 정서를 당국자들이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사정은 잘 알지만 대놓고 밝히지 못하는 딱한 이유가 따로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현재로서는 국민들에게 고통과 부담만 안겨주는 정책으로 검증된 것을 '신주단지' 처럼 계속 끌어안고 갈 것인지 정부와 국민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할 때라는 생각이다.

김우석 전국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