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앞둔 퇴물 가수...그에게 느닷없이 사랑이 찾아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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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호 04면

누구에게나 ‘나이 들수록 이런 영화가 좋아지더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시점이 온다. 나이 듦의 스산함을 곱씹게 되는 순간 말이다. 4일 개봉한 ‘크레이지 하트’는 그런 순간에 대한 공감이 있다면 큰 여운을 간직하게 될 영화다. 특히 이제 머리 한가운데가 좀 듬성해지는 것 같고, 매사 자신감보다는 자괴감이 앞서기 시작하는 중년남성이라면 감정이입 100%. 왕년엔 잘나갔지만 지금은 술집 밤무대를 전전하는 57세의 컨트리송 가수 배드(제프 브리지스)를 보고 있노라면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으로 심사가 복잡해진다. 저 나이 먹어 저렇게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포함해서.

배드의 신세는 딱하다. 알코올중독에 시달려 건강은 엉망이다. 수차례 되풀이한 결혼과 이혼으로 가족도 없다.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볼링장에 공연을 다닌다. 집도 없어 싸구려 모텔을 돌아다니는 건 궁색함의 절정. 만취해 아무 데나 벌러덩 누워 코를 골고, 숙취 때문에 정신이 흐릿해 청바지 지퍼가 열려 있어도 모른다(이 영화의 ‘추레한 독신 중년남성’에 관한 디테일은 상당히 뛰어나다). 하긴 술을 퍼마시게도 생겼다. 자신이 잘나갈 때 피라미에 불과하던 토미(콜린 패럴)가 대스타가 됐고, 자신은 토미의 공연 오프닝에 서야 하는 처지가 됐으니.

그런데 배드는 어느 날 주책 맞게 사랑에 빠진다. 상대는 그를 취재하러 온 아들 딸린 싱글맘 여기자 진(매기 질렌할). 하지만 둘이 잘된다면 정말 그건 영화 같은 얘기일 터다. 술 마시다 제 버릇 개 못 주고 진의 아들을 잠깐 잃어버린 그에게 진은 싸늘하게 이별 통보를 한다. 세상에 어느 엄마가 아이를 잃어버리는 주정뱅이와 같이 살겠느냐마는, 안 풀려도 이 남자 참 안 풀린다.

‘퇴물이 된 중년 남자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이라는 스토리는 지난해 미키 루크가 주연했던 ‘더 레슬러’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잘나갔지만 이제는 동네 수퍼에서 앞치마 두르고 햄을 잘라 파는 레슬링 스타의 초라함도 이 남자 못지않았다. 하지만 ‘크레이지 하트’는 잔잔한 드라마 속에서 희망을 얘기한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처럼 배드는 웬만한 풍파에도 낙천성을 잃지 않는다.

그에겐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실연에서 영감을 받아 쓴 ‘더 위리 카인드(The weary kind)’가 히트해 진과 재회하는 결말은 그래서 기분 좋다. 영화 제목 ‘크레이지 하트’는 이 곡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뜨거운 심장을 추슬러 다시 한 번 도전해야지(Pick up your crazy heart and give it one more try)”. 옳다. 몸은 노쇠해져도 심장마저 차가우리란 법은 없다. 밑줄 쫙.

주연 제프 브리지스는 7일(미국시간) 열리는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이미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의 T 본 버넷이 OST를 담당했다. 컨트리송이 이렇게 감미롭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리고 이 영화를 뛰어난 음악영화로도 기억하게 하는 음악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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