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루프스로 죽을 고비 세 번, 이젠 히말라야도 갑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9시 뉴스를 진행한 KBS 아나운서였고 1995년 첫 지방자치선거에서 조순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운동본부 부대변인이었다. 선거캠프에서 여성이 대변인 역을 맡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조순 시장의 서울시에서 최초로 여성 홍보담당관과 부속실장을 지냈다. 이후 프리랜서로 시사토크쇼(‘정미홍이 만난 사람’ ‘정미홍의 선택 인터뷰’)를 4년 넘도록 진행했다.

늘 카메라 앞에 섰던 그는 2000년 여름 홍보대행사 J&A 설립을 끝으로 언론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정미홍(52·사진). 그가 10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더-코칭 그룹’ 대표란 새로운 명함과 함께였다.

-10년 동안 거의 언론 노출이 없었네요.
“홍보대행사 최고경영자(CEO)로 경영에만 집중했어요. 300개 넘는 기업을 홍보하고, 공공기관·정부 프로젝트도 맡았죠. 2002 월드컵 홍보도 했고요. 홍보전문가로 보이려면 아나운서 출신으로 자꾸 소개되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인터뷰도 안 했죠.”

-새로운 회사를 만들면서 홍보대행사는 접었나요.
“광고파트만 남겼어요. 저에 대한 기대로 입사한 직원들에게는 경영인으로서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죠. 하지만 홍보 일을 하면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요. 늘 일은 많은데 즐겁지 않더라고요. 처음 2년은 조금씩 매출이 올라가는 게 재미있어 ‘돈 벌려면 힘든 게 당연하지’라고 생각했어요. 한 번 손을 댄 거니까 절대 질 수 없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26일 오후 정씨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한편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창립 10년 2010년 매출 50억 달성’이라는 J&A의 목표가 담긴 액자였다.

서울시 홍보담당관 경력은 그에게 길을 열어줬다. 95년 서울시 PC통신 구축작업이 마무리 중일 때, 그걸 뒤엎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전 세계에 홈페이지가 200만 개뿐일 때였다. 일제하 서울이 ‘경성’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이어온 서울시 CI(통합이미지)를 시민 공모를 통해 바꾸기도 했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직관과 창의력으로 얻은 성과가 홍보대행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열심히 10년을 버텼다. 하지만 “쓸데없는 오기”였단다. “아니다 싶으면 빨리 접고 원하는 걸 찾아야 하는 법”이란다.

-그래서 코칭을 찾으셨나요.
“제가 루프스로 투병하면서 환우회를 만들었잖아요. 등록회원이 5000명이 넘는데 그중 1000명은 만났어요. 저도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어렵고 힘든 환자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힘을 심어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강의 기술을 배울까, 상담이나 심리학을 배워볼까 하다가 코칭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런데 코칭을 배우기 시작한 시기에 개인적인 어려움이 몰려왔어요.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아직도 병원에 계시고, 투자를 했다가 경제적 손실도 엄청나게 봤어요. 재판도 2건이나 있었고. 그럴 때 코칭으로 큰 좌절을 겪지 않고 제가 힘을 많이 얻었죠.”

‘코칭(coaching)’은 개인의 잠재력을 찾아 성과를 내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자기계발법이다. 라이프 코칭, 비즈니스 코칭, 건강 코칭 등 다양한 세부 분야가 있지만 국내에선 기업의 관리자 역량 개발 방법 중 하나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포춘(Fortune)지 선정 500대 기업 CEO 중 60%가 정기적인 코칭을 받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정씨는 전문 코치가 되기 위해 2년간 대학입시 준비처럼 공부했다. 인간의 인지활동과 언어 행동, 감정처리법, 의식변화 등에 관한 18개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코치협회의 시험을 거쳐 전문코치 인증을 받았다.

비리ㆍ싸움…요즘 정치인에게 코칭 필요
-코칭은 어떤 건가요. 일반적인 상담이나 컨설팅, 멘토링과 비슷하게 들리는데요.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건 같아요. 상담은 과거를 파헤쳐 원인을 밝히고 거기서 답을 찾아줘요. 컨설팅도 상황을 분석하고 과거를 조사하고 답을 주는 거죠. 멘토링의 경우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구체적인 모델이 돼서 ‘내가 해보니까 이렇게 효과가 있더라’라고 방향을 알려주고 따라하도록 해요. 하지만 코칭은 답을 주지 않아요. 질문을 주고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 찾도록 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해답을 갖고 있다는 전제로 자발적으로 힘을 깨닫고 성취를 이루도록 격려하고 지지하는 파트너 시스템이죠.”

-어떤 사람들에게 코칭이 필요할까요.
“변화와 성장을 원한다면 누구에게나 필요해요. 그런데 저는 정치인이나 청소년한테 중점을 두고 코칭을 하고 싶어요. 정치인은 사회를 바꾸는 리더잖아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과 소통해야 하는데 우리가 보는 정치인은 멱살 잡고 싸우고 비리에 연루되는 사람뿐이에요. 더구나 제가 만난 지도자 중에 남의 얘기를 경청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코칭을 통해 설득과 협상의 기술을 익히면 정치인이 달라지겠죠. 그러면 국정 운영도 효율적으로 바뀌고, 정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국민 의식까지 높아져요. 연쇄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엄청나니까 정치인 코칭이 필요하죠. 청소년 코칭은 아이들이 쓰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말은 곧 성품이거든요. 폭력은 말에서 나오고, 말은 성품에서 나오죠. 성품이란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연습해 체득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코칭을 하면 사회 폭력을 예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교육할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 성품 교육을 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하려고 합니다.”

목소리는 아직 쨍쨍, 방송하고 싶어
그는 3월 20일 히말라야 트레킹을 앞두고 있다. 난치병인 루프스로 15년을 투병하고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던” 그다.

자가면역 질환인 루프스는 외부로부터 몸을 보호해야 하는 면역체계가 이상을 일으켜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병이다.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그는 환우회인 ‘루프스를 이기는 사람들’을 만들어 지금껏 꾸려오고 있다.

“서울시에서 일할 때도 매일 아침 스무 알씩 약을 먹었어요. 약 기운에 얼굴은 퉁퉁 붓고 머리카락은 빠져서 가발도 썼어요.”

병원 치료와 꾸준한 식이요법, 체질 개선으로 6년 전부터는 아예 약을 끊었다. 이젠
건강한 몸으로 5000m 높이를 오르게 됐다는 생각에 그는 살짝 들떠 있었다. 이젠 방송도 하고 싶다고 했다. 한때는 투약량에 따라 달라지는 외모 때문에 방송을 기피했던 그였다.

“옛날 같은 화려한 방송은 아니라도 하고 싶어요. 이젠 병도 다 나았고 주름살은 나이 먹으면 생기는 거니까 어떻게 비춰질지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아직 목소리는 쨍쨍하잖아요? 기회가 되면 따뜻하게 위로가 되도록 방송으로 코칭을 해야죠.”

딸 친구들, 입양 사실 알고 ‘와! 멋지다’
이날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테이블은 매일 오후 정씨의 딸이 숙제를 하는 책상이다. 그는 13년 전 딸을 공개 입양했다. 그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란다.

“너무 예쁘고 저보다 성격이 열 배는 좋은 것 같다”는 고슴도치 엄마의 자랑이 이어지더니 끝내는 “딸 얘기만 해도 눈물이 나온다”고 말끝이 흐려졌다.

-한참 사춘기인 딸이 공개입양 사실을 알 텐데요.
“알죠. 그런데 요즘 애들은 달라요. 딸아이가 친구들한테도 다 얘기했다는데, 반응이 ‘와! 멋지다’는 거예요.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정체성인데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면 정체성이 강해져요. 우리는 아이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줬어요.

아이를 갖는 여러 방법이 있고, 너는 우리의 하나뿐인 소중한 자식이라고.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게 가장 큰 교육이에요.”

홍주희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