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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가지끝에서, 땅바닥에서 … 거문도 동백꽃은 두 번 피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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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거문도는 지금 쑥밭 천지다. 한데 예상했던 쑥밭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거문도 쑥밭은 알록달록 그물 이불을 덮고 있다.

소설가 한창훈과 만난 봄

봄을 찾아 나선 발길은 늘 남녘을 향한다. 봄이 들 즈음 무작정 남으로 방향을 트는 걸음은, 올해 내처 더 나아갔다. 여수항에서 배를 타고 두어 시간, 봄에 갈증 난 걸음은 남쪽 바다 외로운 섬 거문도까지 닿았다. 마침 거문도에는 아는 사람이 있다. 한창훈(47) 형이다. 에세이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를 본지에 1년 가까이 연재 중인 그 소설가다. 거문도에서 나고 자란 한창훈은 지금도 거문도에서 홀로 살고 있다. 섬에서 그의 일상은 양분된다. 낚시를 하거나 책상 앞에 앉거나. 하여 그는 자신의 섬 생활을 “반어반필(半漁半筆)”이라 부른다. 한창훈이 모는 낡은 스쿠터 뒷자리에 걸터앉아 섬을 헤집고 다녔다. 몇 뙈기 안 되는 섬 텃밭에도, 남쪽 바다 내려다보는 볕 좋은 언덕배기에도, 시퍼런 물결 출렁이는 거문도 바다에도 봄은 내려와 있었다. 거문도의 봄은, 뭍에서보다 점도가 높았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봄이 오면 거문도는 조각보 이불을 덮는다

섬에 들기 전 미리 거문도 봄 풍경을 물었다. 가이드로 포섭한 현지 작가는 그러나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글쎄다. 봄이라고 뭐 달라질 게 있겄냐. 바람 불고 파도 치고, 그래도 고기 잡으러 나가고. 다 똑같지, 뭐.”

명색이 문학을 한다는 자의 입에서 이렇게 심심한 대사가 나오다니. 이번엔 섬 아낙의 일상을 꼭 집어 물었다. 본래 봄은, 남도 아낙의 구부러진 허리에서 오는 법이다.

“할매들? 잉, 그려. 죄다 쑥 뜯으러 나간다.”

“쑥?”

“그려, 쑥. 거문도 쑥이 좋단다. 값도 제법 치는가 보더라. 얼마 전엔 쑥 가공 공장도 들어왔다. 요즘 거문도는 온통 쑥밭이다, 쑥대밭인 게지.”

섬에 들었다. 하나 쑥밭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섬을 뒤덮은 쑥으로 섬은 눈이 시리도록 푸를 것이고, 거기에 오후 햇살이 내리쬐면 섬은 초록으로 빛날 것이란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뜨악한 표정의 뭍것을, 한심하다는 표정의 섬 사람이 쑥밭이란 데로 끌고 갔다.

“이게 뭐예요? 그물 같은데? 땅 바닥에 그물 깔아놓고 말리고 있는 거 아닌가? 수선 좀 하려고….”

“잘 좀 봐라. 그물 밑이 쑥밭이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정말 그랬다. 그물 밑은 바짝 엎드린 쑥이 촘촘히 차 있었다. 이번엔 놀란 얼굴의 뭍것에게 섬 사람이 설명을 늘어 놓는다.

“여긴, 바람이 하도 세 쑥밭 위에 그물을 친다. 해풍을 오래 쐬면 쑥도 마른다고 하네. 그물을 쳐 놓으면 바람도 통하고 햇볕도 맞고, 희한하게도 이러면 잡풀은 못 크고 쑥만 산다더라.”

고개 들어 섬을 둘러봤다. 이런, 섬 곳곳이 그물이 덮여 있다. 섬은 본래 바다 위로 솟은 산이다. 하여 섬에서 평지는 드물다. 늘 비탈이 심하다. 섬에서 사람은 그 경사 심한 비탈을 깎아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린다. 그 밭이 지금 그물로 덮여 있다. 가가호호 그물이란 그물은 죄 끌고 나왔는지, 그물마다 색깔이 다르다. 붉은 것도 있고, 파란 것도 있고, 허여멀건 한 것도 있다. 멀찍이서 내려다보니, 섬이 알록달록 조각보로 만든 이불을 덮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여태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의 봄이다.

#거문도 동백은 길바닥에서 핀다

거문도는 크게 유인도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 동도와 서도 그리고 고도. 이 섬 세 개가 모두 가위 동백섬이라 할 만큼 동백나무가 많다. 섬 전체 수종의 70% 이상이 동백나무란다. 거문도에선 땔감으로 동백나무를 쓴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동백 군락지로 가자는 뭍것의 재촉에 섬 사람이 난감한 표정을 지은 까닭이다. 한참을 골똘히 궁리하던 그가 서도 끄트머리 거문도 등대를 향해 앞장섰다.

거문도 등대 가는 길은, 차라리 동백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2㎞ 가까이 이어진 긴 오솔길이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동백나무가 섬 비탈을 가득 메웠고, 그 비탈에 사람이 길을 내자 오솔길에 동백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1 거문도 안내를 맡는 소설가 한창훈씨 모습. 낡은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섬을 돌아다녔다. 2 거문도 등대 가는 길목의 동백 터널.

“거문도 동백은 문자 그대로 동백(冬白)이다. 그니까 겨울에 꽃이 피지. 뭍에선 동백꽃 보고 봄이 왔다고 호들갑 떨지만 그건 춘백(春白)이잖냐.”

그러고 보니 거문도 동백은 이미 한참 진 다음이었다. 가지 위에 핀 송이보다 길에 떨어진 꽃잎이 훨씬 많았다. 아무래도 이 길은, 사람이 걷기에 좋은 길이 아니었다. 바다를 옆구리에 낀, 아늑하고 평탄한 오솔길이지만 사람은 통행이 금지되어야 되레 마땅한 길이었다. 길 바닥 가득히 동백꽃 송이 송이가 흩뿌려져 있어서다.

동백꽃은 시들기 전에 뚝, 떨어진다. 동백꽃은 어느 순간 자신을 부양한 가지와 결연히 이별하고 추락을 감행한다. 하여 동백은 두 번 핀다. 한 번은 가지에서, 또 한 번은 땅바닥에서. 길바닥에 뒹구는 동백꽃을 무심코 밟았을 때 발바닥에서부터 전해오는 물컹한 감촉으로 사람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시들어 떨어져 길바닥에서 말라붙은 여느 꽃을 밟았을 때는 알지 못하는, 아찔하고도 슬픈 감각이다.

거문도 등대 길을 걷는 건 아직 지지 않은 생명을 어쩔 도리 없이 밟고 지나가야 일이다. 거문도 동백꽃은 길바닥에서 핀다.

#길섶 유채가 눈을 찌르다

섬 사람이 다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흔해 빠진 동백 따위에 감격하는 뭍것이 딱해 못 보겠다는 얼굴이다.

“또 뭘 보고 싶으냐?”

“딴 꽃은 없어요? 유채 같은 거.”

섬 사람이 잠자코 오토바이에 올라타더니 고도로 돌아온다. 거문도에서 가장 번화한 섬이 고도이고, 산처럼 삐죽한 모양의 고도 중턱에 거문초등학교가 있다. 오토바이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학교를 지나쳐 산마루까지 치고 올라간다. 산마루 위에 단정하게 정돈된 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른바 영국군 묘지다.

학꽁치 잡으러 나선 어선. 요즘 한창 올라오는 학꽁치는 배 맨 앞에 앉은 어부가 눈으로 고기떼를 확인해 잡는다.

1885년 4월 15일 영국 군함이 거문도에 상륙한다. 그들은 제 집 찾아 들어오듯이 아무 거리낌없이 섬에 들어온다. 역사책에서 배운 ‘거문도 사건’의 전모다. 영국은 조선 영토를 무단 점령했고, 이 사실을 조선 정부는 한 달 가까이 알지 못했다. 더 놀라운 건, 영국 군대가 거문도에 잠깐 머무른 게 아니었단 사실이다. 그들은 무려 2년 가까이 거문도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역사다.

그 2년 가까운 세월 사이 영국군 세 명이 거문도에서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데, 글쎄다. 섬 주민에 따르면 영국 군인과 거문도 주민은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제법 내왕이 잦았단다. 그때만 해도 영국군이 점령한 고도와 조선인이 모여 살던 서도 사이에 다리가 없어 술이 궁금한 군인 몇몇이 밤에 몰래 헤엄쳐 오고 그랬단다. 그때 물에 빠져 죽은 영국 사람이 있었다고 하던데…, 100년 넘게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들려주는 섬 사람이 말꼬리를 흐렸다.

하필이면 여기가 유채꽃 군락지다. 무덤가에 피는 꽃은 사람이 죽어 환생한 것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무덤가 꽃은 유난히 더 곱고 화려하다. 영국군 묘지엔 때맞춰 유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유채꽃이 무리 지어 만개했을 때 송이마다 뿜어내는 노란색은 두껍게 칠한 유화 모양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노란 기운이 둥실둥실 떠 있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섬에 내려앉은 햇살이 노란 유채꽃에 반사돼 눈을 찌른다. 제주도처럼 부러 조성한 군락지가 아니어서 거문도 유채는 더 정이 간다. 길섶에도, 봉분 위에도, 동백나무 그늘에도 유채꽃은 아무렇게나 흐드러져 있다. 마침 샛바람이 분다. 유채꽃이 흔들린다. 노란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 오른다. 눈이 따갑다.

여행 정보=거문도 가는 배는 여수에서 뜬다. 매일 오전 7시 40분과 오후 1시 여객선 ‘오가고 호’가 여수항을 출발한다. 3만6000원. 거문도에서 나오는 배 시간은 오전 10시 40분과 오후 3시 40분이다. 여수에서 들어온 배가 그대로 나간다. 뱃 시간은 2시간 남짓. 거문도 여행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 백도 유람선 관광이다. 백도는 거문도에서 28㎞ 떨어진 무인도인데 날마다 유람선이 두 시간 동안 백도 주위를 둘러보고 돌아온다. 2만9000원. 거문도관광여행사(www.geomundo.co.kr)에서 패키지 상품을 운영한다. 061-665-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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