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1사단 작전처 소속이었던 남성인 중위는 공중과 지상을 연결하는 미군 공지(空地) 장교의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사단 내에서 가장 바빴던 사람이기도 했다. 최전방에 나가 있는 관측병들로부터 적의 동태를 수집해 이를 영어로 번역한 뒤 미 공군 장교에게 전달하느라 밤낮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선이 더 밀리고 있었다. 경북 선산의 오상중학교에 설치했던 사단 사령부(CP)를 대구 인근으로 옮기기 위해 철수할 때였다. 트럭과 지프에 올라타고 학교 문을 나설 무렵에 문득 남성인 중위가 보이질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 중위 어디 갔어? 왜 보이지 않는가”라고 사단 본부 사람들에게 내가 물었다. 모두들 “글쎄요…” 하는 표정이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봤지만 그의 소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불현듯 격무로 잠이 부족해 가끔 고개를 떨구고 코를 골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사용하던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 한구석의 책상 밑에서 코 고는 소리가 힘차게 들리고 있었다. 남 중위였다.
“얼른 일어나, 이 사람아. 빨리 후퇴해야 해!” 그는 내가 부추겨서 일으켰을 때도 비몽사몽이었다. 잠이 깨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어디 가는데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는 명절이면 꼭 카드를 보내왔다. 늘 “CP를 옮길 때 사단장님이 저를 깨워 데려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정말 소름이 돋습니다”라면서 인사를 전해 왔다. 가끔 고국을 방문할 때면 꼭 찾아 왔다. 그때마다 오상중학교의 교실에서 누워 자다가 위기상황을 맞을 뻔했던 그 당시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고는 했다. 그랬던 그는 지난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50년 8월 초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전선의 방어에 나섰다. 영덕 전선으로 이동 명령을 받은 미군 트럭이 105㎜ 야포를 끌고 전투 지역으로 급히 향하고 있다. [미 육군부 자료]
참모들에게 방어선에 대한 내 구상을 설명했다. 보통 나는 방어선 등에 관해서는 참모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참모들이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해도 이번만큼은 내 뜻을 관철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참모들도 그 지역을 둘러보고 오더니 한결같이 “이곳으로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면서 선뜻 동의했다. 그렇게 국군 1사단의 마지막 방어선은 정해졌다. 역사 속에서 늘 등장하는 배수진(背水陣)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임진강을 넘고, 한강을 넘고, 다시 낙동강을 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넘을 강이 없었다. 이곳을 내주면 우리는 바다로 간다. 그곳에는 소멸(消滅)만이 기다리고 있다. 일제(日帝) 강점기를 거쳐 독립한 지 2년밖에 안 된 대한민국이 사라질 판이었다.
다부동의 마지막 저지선이 뚫린다면 대구는 그대로 적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미군은 그 경우에 대비해 밀양 지역에 저지선을 설정했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북한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게 아니었다. 밀양은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들이 일본 또는 자국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철수 시간을 버는 개념의 저지선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럴 경우 마지막으로 제주도를 향할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 서남부의 작은 섬으로 쫓겨 간 대한민국을 지키려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라는 섬에 옮겨 간 대한민국은 전략적으로 지킬 가치가 없을 것이다. 미군은 그런 대한민국을 버릴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다부동 전선의 의미는 강해지고 있었다. 이곳을 우리가 지켜내지 못하면 미군의 막대한 지원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곳을 지켜야 한다. 나는 그 의미를 참모들에게 다시 강조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귀관들은 모든 힘을 바쳐 마지막까지 싸워주기 바란다.” 묵묵히 내 말을 듣던 참모들의 표정에 비장감이 서렸다. 동명국민학교 교실에 차린 사단 CP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도 함께 흘렀다.
백선엽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