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쿵제의 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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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16강전
[제10보 (171~192)]
黑.송태곤 7단 白.쿵제 7단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아름답다. 인간사도 바둑도 그처럼 아름답게 흐를 때가 있다. 어느 날 흐름이 비틀리며 파탄이 찾아온다. 이제는 한걸음씩 뗄 때마다 젖먹던 힘을 쏟아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171로 따내는 패. 이 패는 흑이 이기면 백이 죽고 백은 이겨도 빅이 고작이다. 백은 이미 중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

하지만 쿵제7단은 생사를 잊은 듯 백△로 흑대마를 공격하고 있다. 단 한점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고 생각하니 피눈물이 난다. 비단결처럼 곱게 흐르던 바둑판이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172, 젖히고 174로 들어간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생명을 연장한다.

등 뒤에 패라고 하는 천근만근의 짐을 진 채 천하장사 송태곤7단과 육박전을 전개하는 쿵제의 모습이 귀신처럼 섬뜩하다.

논리적으로는 끝난 바둑이다. 그러나 생사를 잊은 쿵제의 처절한 저항 속에도 한가닥 최후의 노림이 숨어 있다. 그는 좌상 백은 버린다는 계산이다. 수를 늘린 뒤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178로 흑의 상하를 양분한 뒤 실은 우하의 흑대마를 놓고 마지막 일전을 벌인다는 계산이다.

참으로 요원한 노림이다. 더구나 송태곤은 어려서부터 단병접전에 관한 한 최고로 손꼽히는 인물이었고 그래서 별명도 '소년장사'였다. 더 자라서는 '폭풍'이란 별명을 얻었다. 아직 노련미는 부족하지만 생사를 건 들판의 전투에서는 일당백의 용력을 지닌 사람이다.

190에서 상하의 흑은 확실히 양분됐다. 그 다음 좌상의 패를 놔둔 채 192로 우하의 대마를 잡으러 갔다. 최후의 일전이다. (176.182.188=◎, 179.185.191=171, 180=172)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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